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iper Jun 24. 2020

조종사는 일하면서 여행한다

비행기 속 오해와 진실 (2)

“우와~ 기장님이시면 여러 나라 여행 많이 다니시고 좋으시겠어요~” 제 직업이 기장임을 알게 되는 순간 대부분의 지인들이 처음 보이시는 반응인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케바케(Case by Case)’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저비용 항공사의 경우 국내 공항과 일본,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와 괌, 사이판 정도가 주요 취항지인데, 통상 출발지로부터 얼마나 먼 곳에 가느냐에 따라 체류 여부가 결정됩니다.


국내선과 편도 3시간 이내의 구간은 통상 ‘퀵턴’ 노선으로 분류됩니다. 말 그대로 빨리 갔다 오는 비행이지요. 모시고 간 승객들이 목적지에 내리시면 후다닥 기내를 정리한 다음 돌아오는 승객들을 모시고 바로 출발지로 돌아옵니다. 그렇다 보니... 아마 제가 지금까지 제주도에 가본 횟수가 최소 500번 이상 되는 것 같은데, 막상 제주공항 바깥 경치 좋은 곳에서 싱싱한 회 한 점에 소주 한잔 해본 기억은 고작 열 번 이내에 불과합니다. ㅠㅠ

비록 공항이지만 제주도에 오긴 온 걸로~

아~ 일본이나 대만 같은 국제선의 경우에는 ‘퀵턴’이라 하더라도 간혹 한두 시간 여유가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땐 승객분들이 내리자마자 부기장의 손을 잡고 룰루랄라 노래 부르며 비행기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왜냐고요? 공항 면세구역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먹거리와 필수 구매 물품이 즐비하거든요. 이를테면 타이베이의 완탕과 밀크티, 도쿄의 바나나빵 같은 것들 말이죠.

대만의 명물 완탕면과 밀크티

홍콩을 넘어 동남아로 가거나, 괌•사이판 비행일 경우에는 하루 또는 이틀의 체류 시간이 주어집니다. 와우~ 그때는 신나게 여행을 즐기시면 될 것 같다고요? 쩝... 일단 그전에 여러분들이 여행 가셨던 기억을 한번 떠올려주세요. 언제 출발해서 언제 도착하셨나요? 네 맞습니다. 대부분의 동남아 노선은 저녁에 출발해서 현지에는 한밤중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지요. 20대라면 달밤에 체조라도 하겠지만, 마흔 살이 넘어가니 체력이 달립니다.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샤워하고 시원한 맥주 한 캔 꺼내 마시고는 바로 잠자기 바쁘죠. 그리고 제가 후다닥 잠을 자는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늦게 일어나면 호텔 조식을 못 먹거든요.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조! 식! 은 필수입니다.


여하튼 그렇게 조식을 먹고 나면 지역에 따라서 근처 쇼핑센터에 가거나 마사지를 받는 여유를 부리기도 합니다. 부기장 시절엔 기장님들 쫓아다니는 게 참 좋았었는데, 시대가 바뀌다 보니 기장이 된 요즘은 일부러 혼자 다니기도 하죠. ‘꼰대’ 될까 봐 두렵거든요. 그렇게 돌아다니며 대충 저녁 요기를 하고 나서는 어두워지기 전 얼른 호텔로 돌아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해야 합니다. 어젯밤 그곳에 도착한 시간이 바로 오늘 제가 출발할 시간이고, 그때부터 ‘깊은 밤을 날아서’ 한국으로 와야 하거든요. 설마... ‘비행기에서 자면 되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안 계시겠죠? 저희는 승객분들이 한국까지 오시는 동안 편안히 쉬실 수 있도록 두 눈 부릅뜨고 비행해야 합니다... 혹시나 앞으로 공항에 도착하셨을 때 새빨갛게 충혈된 멍한 눈으로 걷는 조종사들을 보시거든 마음속으로 ‘토닥토닥’ 한 번씩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주 가끔은 이틀간의 48시간 체류 기회가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때는 좀 여유롭게 주변 관광지도 둘러보고, 함께 간 팀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죠. 어떤 경우에 그렇게 긴 체류가 가능하냐고요? 바로 이겁니다. ‘어디 어디 주 7회 취항’ 이러면 매일 한 대씩 들어가기 때문에 전날 도착해있던 조종사들은 딱 하루만 쉬고 다음날 들어오는 항공기를 받아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반면, ‘주 5회 취항’ 노선일 경우 계산상 주당 두번 정도는 48시간 체류의 행운을 얻는 조종사가 생기게 되는 것 이랍니다. 네. 뭐 당연히 저 같은 막내 기장들에겐 그런 기회가 흔치 않겠죠?

베트남 나트랑 해변 산책

자~ 어떠신가요? 이 글을 읽으신 후에도 조종사들의 매 비행이 여행이라 생각되시나요? 그때그때 다르죠? 하지만, 새로운 나라의 문화를 자주 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분명 소중한 혜택이라 생각하기에, 늘 승객 여러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가셔야 저도 비행을 가거든요. ㅋ



작가의 이전글 오토파일럿 덕분에 조종사는 놀면서 비행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