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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원 Mar 19. 2020

우울에 대하여

누군가의 우울이 듣고 싶어 지면 나는 그에게 내 우울을 애써 꺼낸다. 상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데 선물을 해야 할 때. 내가 받고 싶었던 것을 골라내는 행위처럼, 받고 싶은 것을 먼저 건넨다.

우울이 우울로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고른 선물이 상대에겐 ‘그저 그런 것’ 정도일 수 있는 것처럼. 실은, ‘나도 그런 일이 있어.’라고 자기 얘기를 시작할 거란 내 예상은 엎어질 때가 더 많다.


“근데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나름 좋아!” 당신의 우울을 얻는 것에 실패하고, 남겨진 거라곤 심각해진 분위기뿐일 때. 쌓인 경직을 풀어내기 위해 허탈하고 심심한 웃음을 터뜨려보지만, 되려 안쓰러움이 더해진다. 우울은 만회하려 해 봤자 뒤집어쓴 재이고, 수습하려 할수록 지저분하고 궁상스러워지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마치 인간극장 마지막에 ‘다음 이야기’-BGM의 힘처럼, ‘빠라바밤 바밤 빠바바밤’이 흐르면 아무리 행복한 장면도 내포하는 아픔이 있을 거란 오해를 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우울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다. 그 축 쳐지는 감정이 반겨도 되는 존재인지, 이유를 막론하고 일단 내쫓아야 하는 부류인지 수없이 고민하는 밤을 보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우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대체로 많은 것을 오래, 깊게. 유난하고, 억지스럽게 생각하곤 한다.
그건 그렇게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과 선택이 결부된 지점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가장 간절한 바람은 세상에 소외된 것들을 살피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과 함께 울고 싶고, 많은 것들로 인해 아프고 싶다.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고민한 결과 내게 있어 우울은 싫지 않은 존재로 판명이 났다. 기쁨이나 행복과 같은 ‘감정’으로 여기기로 결정했다. 사람을 살뜰히 대하듯, 어떤 감정도 천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다.
꽤 위험한 발상이었다. 홀대받는 우울을 사랑하고자 한 실천은, 우울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무기력으로 이어졌고, 우울한 기분과 무기력한 상태가 싫지 않았기 때문에 줄곧 이불을 껍질 삼은 누에고치가 되었다.


우리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이미 내 속에서 흘러나온 우울이 잡아먹어버려서 되돌릴 수 없어질 때가 잦아졌다. 나를 만나러 온 당신의 첫 표정과, 한껏 우울을 나누고 또 애써 수습하다가 맞게 되는 마지막 표정 사이의 간극이 극명해질 때면 좌절을 느껴야 했다. 죄스러웠다고 해야 할까. 내가 당신에게 슬픈 표정을 안겨주었다는 자책에 이어, 이다음에 만날 사람과는 당최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해나가야 할지가 막막해졌다. 그럼 ‘사람을 만나서 대화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라고 어김없는 결론을 더듬거리며 집어내고, 어려우면 피하고만 싶어 지는 것이다.


우울이 오래 머물면 사람을 만날 수가 없으며, 대인관계에 해롭다는 진부한 결과를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친밀하기 위해서라면, 우울은 털어내는 것이 유익하다.’라고 결론 지으려 하면 중요한 것에 밀려 묵인되는 존재들이 자꾸만 생각나서 슬퍼지는 것이다. 무언갈 밀어낸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해진다.



나의 우울을 쉽게 꺼낸다. 아마 내가 쓰는 모든 글 역시도 우울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으리라. 글 속에 드러나는 내 모습을 보면, 쓰다듬는 손길에 파삭-하고 죽어버리는 한 마리의 하루살이가 떠오른다. 그토록 나약하고 쉽게 짓밟히는 나를 드러내면서 얻고 싶은 것은 당신의 이야기이다.
나의 우울을 드러내는 것은 완벽한 무장 해제를 당신에게 허락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나만의 전략적 언어이자,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꺼내서 당신과 무엇이든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사랑의 신호이기도 하다. 내 우울을 들어, 당신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거란 것을 믿는 마음이며, 내 우울을 들추어 냄으로 당신의 우울을 들을 수 있기를 고대하는 간절함이다. 동시에 절대 당신을 공격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이기도 하다.


우울이 찾아오면 반겨야 할까, 내쳐야 할까. 나는 우울을 떨쳐내기보다 품어, 내 안에 살게 하고 싶다.
그렇게, 나의 우울을 빌어 당신의 우울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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