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고 시작된 작은 빗줄기가 자정이 넘어 장대비로 바뀌며 시원하고 후련한 비 맛을 선사한다. 습기 머금은 바람이 처마안으로 들이치니 바지 걷은 종아리에 물방울이 느껴진다. 샌드위치 패널로 만든 지붕에 부딪히는 요란한 빗소리가 참 좋다. 펜션 마당에 고정된 캐노피가 있어 외등을 켜고 시작된 잡담 자리가 술과 잡다한 안주가 배달되며 술자리로 발전되고 이미 밤이 깊었다.
마당 가까이는 우물과 아직 연기가 가시지 않은 바지락 삶았던 마당 아궁이가 시골 구색을 맞추고 있고, 어둠에 겨우 식별할 수 있는 옥수숫대가 비바람에 서로를 비벼대고 있다. 가볍고 단편적인 이야기도 좋았는데, 중년들의 부모가 된 입장에서의 자녀들과의 관계와 생겨나는 공통적인 문제 그리고 그 해법들을 나누는 과정에서의 진솔한 그들의 이야기가 매우 공감이 가니 술병이 계속 늘어난다.
굳이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성인이 되었던 아니던 아이들은 결코 단순하지도 나약하지 않으며 영악할 수도 있다는 것과 부모들도 실수투성이 불완전체인데, 완벽한 보호자로 전제된 관계에서의 갈등과 그로 인한 아물어지지 않는 상처쯤은 누구가 가지고 있다는..
" 그때는 엄마도 어렸다. 너무 어려서 몰라서 그랬다. 미안하다.!"
50을 바라보는 지금의 나보다 열 살도 더 어렸던 서른 살 적 엄마를 소환하여 항의를 했고 그에 대한 엄마의 솔직한 답변에 숙연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사람과 시간에 연장된 술자리가 새벽 2시에나 끝났다.
이튿날, 늦은 취침과 과음으로 제일 늦게 일어났다. 아침식사는 어제저녁 삶아서 손질해둔 바지락죽인데,
해장으로 바지락죽을 두 그릇을 비우고 은영이와 섬 산책을 다녀왔다. 펜션이 있는 마을 앞바다는 바지라기 양식장이 있고 펼쳐진 바닷가 오른편으로 선착장이 보인다. 선착장에서 마을로 오는 길 도중에 깃대봉으로 향하는 산행길 들머리가 있어 어제 일행들과 산행을 시작하여 깃대봉 흘기재 왕재봉을 거쳐 한얼 해수욕장 백사장을 거쳐 마을로 회귀하는 약 3시간 코스의 트레킹이 있었다.
작은 섬이지만 마을은 20여 가구로 성당도 교회도 있어 있을 건 다 있다. 담벼락에는 수채화 같은 산뜻한 색깔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주제는 다듬이 방망이질 같은 옛날 삶의 모습과 고기 잡는 모습, 그리고 옹기그릇 등을 소재로 하였는데, 옛날 새우잡이가 성행했고, 잡은 새우로 젓갈을 직접 담갔는데 그 양이 많아 옹기를 짓는 가마가 섬에도 여러 개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바닷가에 조약돌 사이에 깨진 옹기 조각이 수십 년 바닷 세월에 매끄럽게 닳아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마을은 쓰레기 조각하나 보이지 않게 깨끗하였고, 불필요한 블록담장은 해체하여 답답하지 않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눈인사와 말 인사를 먼저 건넬 정도로 친절하고 적극적이다.
공소(마을성당)의 종소리가 아날로그 하게 울려 퍼진다.
공소는 어제 가보니 약 50석의 긴 의자와 중앙의 예수님 매달린 십자가와 왼편의 작은 성모상이 전부이고, 건물은 7-80년은 족히 되는 오래된 건물에 흠이라면 구획된 샌드위치 패널이 눈에 거슬리는 정도이다. 앞마당에는 너른 잔디와 정원 그네가 있고, 익숙하지만 이름 모를 관목 꽃나무와 한두 해살이 들국화 무리들이 적재적소에 놓여 있다.
올해 1월부터 매주 첫째 주는 섬 산행을 계획하였으며, 자월도, 덕적도, 소이작도, 대이작도, 승봉도 등을 다녀왔고, 이번 달 섬 투어는 문갑도이다. 섬 산행과 여행이 좋은 것은, 사람 왕래가 적어 육지산보다는 나무와 풀과 흙과 낙엽마저 잘 보존되어있고, 우리 일행 외에는 사람 부딪힐 일이 없는 산행을 할 수 있는 한적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월 연안부두를 떠나는 배를 타고 떠나면서, 육지의 일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다는 약간의 무책임한 체념이 나를 편안하게 하였고, 악천후에 몇 날 며칠이고 돌아갈 수 없는 난감한 상황도 은근히 기대도 있는 그런 이유이다.
다른 섬과는 달리 마을도 하나밖에 없고, 흔한 횟집도 하나 없이 유일한 매점 하나 있는데, 매점주인이 조개잡이나 다른 외출을 나가면, 그 앞에서 돈 들고 마냥 기다려야 하는 그런 섬이다.
그래서 문갑도는 돈보다 실물이 갑인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