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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릿집의 추억

by 조경래 기술사

곰 같은 하비가 재주를 부렸다.

지금은 늦은 밤이고 막걸리 골목 영업이 끝나는 시각이라서, 내가 주차하는 사이에 몇 집을 문전 박대를 당하고, 마지막 집에서 새벽 한 시까지 앉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하비 말로는..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고 한 것이 필살기였다는데..

난 서울이 아닌 인천에 살고 있고, 본래 전주에서 자랐으니.. 더군다나 내 행색으로 봐서는 서울 사람은 천부당한 말이고, 이 집도 서울 사람 아니어도 이미 두 테이블의 손님이 있었으니, 한시까지 영업이 대접이나 배려는 아니다 라는..

팩트 가닥이 잡혔는데, 폭행은 하지 않기로 했다.

2만 5천 원짜리 기본 안주에 막걸리 한주전자를 시켰더니, 이런저런 작은 접시가 깔리고, 육전과 두부김치 모시조개 찜까지가 기본상이다.

우리 대학 들어가기 전 어려서부터 다니던 그 집이 생각이 났다.

"하비..!
초포 식당 기억나냐..?"

"무슨 식당이요..?"

역시나 하비는 기억하질 못한다.

지금의 전주 전통 막걸릿집 문화는 전주에 이런저런 선술집들이 모태가 되었는데, 초포 식당도 그중 한 획을 그었던 곳이다.

그 당시 막걸리병은 지금처럼 단단하지 못한 소프트 보틀 이어서, 500cc 생맥주잔 같은 플라스틱 병 홀더에 수납하여 주거니 받거니 하였었고,

빈병은 테이블 좌측부터 세워두면 한 줄에 7병이니, 앉았다 하면 서너 명이 세줄 정도 마시는데, 안주는 12개 정도가 기본 안주이다.

자리가 끝나기 전까지 빈병을 치우지 않고, 세워두었던 것이 불문율이었고, 네댓 병 먹고 자리 뜨는 이웃 테이블의 하수 술꾼들을 은근히 무시하기도 했었다.

거뜬하던 오줌보가 서너 병이 넘어가면 소변으로 바빠지는데, 선술집 소란함이 문짝이 닫히면서 조용해지는데, 30촉 변소 등에 소변기도 없는 디딤판에 발을 딛고 벽에 소변을 보면 활자처럼 떠오르는 생각..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디인가..?"

초저녁 엄마가 해주신 육개장에 곁들인 막걸리 한잔에 두어 시간 깊은 잠을 자고 나서, 9시 반이 넘어서 혼자 야간 투어를 나섰다.

전동성당 입구로 시작하여 전주 한옥마을을 느리게 운전하며 둘러보았고, 내가 다니던 중학교터에 자리 잡은 리베라호텔을 돌아서, 우리 살던 집터를 지나서 아중리의 영업이 끝난 강훈이네 가게를 들러서 전주역을 지나 전북대를 돌고 백제로를 통해 귀가하는 길에 하비를 불러 냈다.

하비 어머니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니 감사할 일이라고 하고, 여러모로 착한 하비는 여전히 엄마와 내 자란 전주를 지키고 있다.

짧은 시간에 막걸리도 한주전자, 이야기는 30년 세월을 이야기했는데도, 차를 두고 오는 나를 우리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하비! 우리 집까지 바래다주었으니, 다시 너네 집 바래다줄게 " 했더니 "아녀요 혼자 가면 돼요.." 한다.

머리 굴리는 나는 항상 빈말이고, 곰 같은 하비는 언제나 진심이란 걸 나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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