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악은 도대체 실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결국 하나를 향해 가고 있어. 완성, 통합, 사랑.......

by 정강민

물기를 머금은 여름의 숲길. 잎이 무성한 나무 사이로 햇살이 부서지듯 내려오고 있었다. 벌레 소리가 간간이 들렸고, 숲길 옆으로는 작은 개울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J와 빛은 말없이 걷고 있었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흔들렸다.


한참을 걷던 J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빛, 악이라는 건… 도대체 실체가 있는 걸까?”

빛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옆의 바위에 앉았다. 나뭇잎 사이로 들어온 빛이 얼굴에 얼룩지듯 드리웠다.

“악은 실체라기보다, 결과에 가까워. 우리가 무언가 잘못했을 때 돌아오는 고통, 그게 곧 악이지. 악마가 악을 만든 게 아니고, 악마가 따로 존재하는 것도 아니야. 우리 안의 무지가, 그릇된 감정이, 어리석은 선택이 스스로를 괴롭히는 거지.”

“내가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받는 고통도 있잖아?” J가 물었다.

빛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지금 현상계뿐 아니라 그 전 삶에서 잘못했던 일도 이번 생에 고통으로 돌아올 수 있지. 계속 말했지만 그 고통은 우리를 벌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더 성장시키려는 것이지.”


J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았다. 땀방울이 이마에서 흘러내렸고, 멀리서 종달새 소리가 들려왔다.

“빛, 타인을 괴롭히는 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괴롭히는 거네?”

“그래. 그게 인과법이야. 타인에게 던진 고통이 돌아오는 거. 미움, 분노, 질투 같은 감정으로 타인을 상처 주면, 결국 그 감정이 내 삶을 갉아먹지.”

J가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쁜 사람을 보면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어.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빛은 풀잎 하나를 천천히 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맞아. 처벌이 필요할 때가 있어. 근데 그 바탕이 미움이면, 그 역시 악의 반복이지.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는 처벌이어야 해. ‘그가 다시 선을 행할 수 있도록’ 말이야. 부모님이 자녀를 체벌할 때 마음처럼.”


숲길 아래 작은 연못가로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연못에는 수련이 피어 있었고, 물속에는 잉어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그런 말을 했지.” 빛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끊임없이 악을 꾸미지만, 결국 선을 위해 일하는 존재’라고.”

J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유혹이 있어야 우리가 유혹에 저항하는 힘을 기를 수 있어. 시험이 없다면 성장도 없어. 근데 대부분은 유혹이 오면 힘없이 무너지지. 악도 결국 우리를 더 깊은 선으로 이끄는 자극일 수 있어.”

J가 말했다.

“악마조차 인간의 성장을 돕는 존재라면, 세상엔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없는 거네.”

빛이 조용히 웃었다.

“세상엔 절대적인 악도, 절대적인 선도 없어. 모든 건 과정이야. 고대 신비주의 전통에선 이 세상을 ‘위대한 대장정’이라 불렀어. 이 혼란스럽고 무거운 세계에서, 인간이 점점 더 빛나는 세계로 나아가는 여정이지.”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신비주의 철학자 플로티노스는 그렇게 말했지. ‘외로운 자(The Lonely)가 하나(The Alone)를 향해 나아간다’고. 우리는 결국 하나를 향해 가고 있어. 완성, 통합, 사랑....... 그런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어떤 상태.


J는 물가에 앉아 조용히 발끝을 물에 담갔다. 시원한 물이 발목을 감싸며 졸졸 흘러갔다.

“성장은 고통스러워. 그런데 고통을 겪고 난 후 깊어지더라구. 근데....... 성장하는 게 즐거운 순간도 분명 있었던 것 같아.”

빛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성장은 본래 즐거운 일이야. 그게 즐겁지 않다면 방향이 어긋난 거야. 진짜 성장은 내면이 맑아지고, 마음이 넓어지고,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일이거든. 억지로 버티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가고 싶어지는 길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J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부턴 유혹이 와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그 안에 숨은 배움을 찾아봐야겠네.”

빛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래. 유혹은 네가 강해질 기회야. 고통은 네가 더 넓어질 시간이고. 악은 네가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거울이야. 중요한 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그리고 더 나은 나로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거야.”


바람이 연못 위를 스치며 작은 물결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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