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지 못한 숙제의 흔적

두려움은 우리를 막는 벽이 아니라, 우리가 열어야 할 문이다.

by 정강민

매미 소리는 뜸해지고, 대신 귀뚜라미 울음이 땅에서 올라왔다. 들녘에는 벌써 가을빛이 내려앉아 바람이 불 때마다 바다처럼 일렁였다. J와 빛은 논두렁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풀밭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곤 했다. 땀은 흐르지만 바람은 한결 시원해, 걷기와 쉬기를 번갈아 하는 게 오히려 즐거웠다.


J가 빛을 보며 말한다.
“빛, 사람들을 보면 참 이상해. 다들 같은 문제로 계속 넘어져. 어떤 사람은 결혼에 실패하고 또 같은 이유로 다시 실패하고, 나쁜 친구를 둔 사람은 또다시 같은 사람을 곁에 두잖아. 사업가도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나도 그렇고. 왜 그럴까? 왜 똑같은 함정에 또 빠지는 걸까?”

빛이 논두렁을 바라보다 J 쪽으로 보며 말한다.
“그건 풀지 못한 숙제를 계속 들고 다니기 때문이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 안의 의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지. 정신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대하니 결과도 달라질 수가 없는 거지. 숙제를 내팽개쳤으니, 다시 같은 문제가 돌아오는 거지.”

J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손가락 사이에 끼우며 중얼거렸다.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해서 같은 문제가 되풀이된다는 거지?”

“그렇지. 사람들은 대체로 불운이나 팔자 탓을 해. ‘하늘이 나를 저주했다.’, ‘운이 없었다.’는 식으로 남 탓을 해.”

빛이 말을 이었다.

“변명은 풀지 못한 숙제의 흔적일 뿐이야. 그건 두려움 때문이지. 두려움을 직면하지 못하면, 어려움에서 자꾸 도망가게 돼. 그렇게 회피하다 보면 결국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만나게 돼.”


J가 먼 산을 쳐다보며 말한다.

“두려움은 늘 나를 위협하는 적 같아.”

빛이 확신에 찬 말투로 말한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런데 두려움은 우리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문이야. 멀리서 보면 산처럼 커 보여도, 다가가면 길이 열려 있는 언덕일 때가 많지. 두려움은 삶이 던지는 위협이 아니라, 성장으로 이끄는 초대장이야.”


J가 땅에 앉아 한 줌의 흙을 집어 들었다. 흙 속에 스며 있는 여름의 온기와 다가오는 가을의 서늘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결국 삶이란 건 두려움과 싸우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서 배우라는 거네?”

“그래. 두려움은 나를 넘어뜨리려는 힘이 아니라, 내가 일어서는 법을 가르쳐주는 힘이야.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그 숙제를 풀기 위해서야.”

“여하튼 변명은 안 돼. 사람의 말속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변명과 합리화는 성장을 가로막고 지연시키는 장애물이야.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을 피해 가도록 부추기는 유혹이지. 대부분은 자기 목숨이 달린 것처럼 변명을 붙잡고 살지. 그렇게 수십 년을 보내면, 영혼은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야.”

J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남이 하는 변명은 속이 훤히 다 보여. 내가 하는 변명도 세상은 꿰뚫고 있겠지?”

“당연하지. 우린 서로 뻔히 보이지만 넘어가 주는 거지. 우린 자기 잘못이라는 점은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남 탓으로 강하게 믿고 싶은 거지. 그래서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지.”


J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벼 이삭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말한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성향이나 습관은, 어쩌면 수만 년 전부터 이어져 온 걸 수도 있겠네? 그 오랜 세월 동안 고치지 않고 변명과 합리화만 하다가 결국 지금까지 질질 끌고 온 거라고 보면.”

빛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가리켰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지. 우리가 태어난 이유는 그 변명 보따리를 계속 짊어지라는 게 아니라, 거기 담긴 잘못을 바로잡으라는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잘못을 고치기보다 변명을 포장하는 데 더 힘을 쓰지. 그러니 같은 문제, 같은 고통을 다시 만나는 거지.”

J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진짜 독립적으로 사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다들 전통이나 관습, 남의 시선을 의지하고 살아가잖아. 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사람들이 받아들일까부터 고민하고. 결국 남의 눈에 맞추려다 자기 숙제는 또 미뤄버려.”

빛은 바로 답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가 세상에 다시 태어난 이유는 과거의 잘못을 두둔하고 변명을 늘어놓기 위해서가 아니야.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함이야. 이런 생각을 해야 건설적으로 삶을 설계할 수 있지.”

“우린 누구나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 선조들이 정해 놓은 관습과 전통을 완전히 무시하고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 나의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역사적 위인, 학자, 현자의 생각과 사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어. 아무리 독특한 생각이라도 사람들로부터 공감과 동의를 얻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지.”


J가 재빨리 말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 성장하려면 결국 자기 몫의 숙제를 직면해야 해. 우리 안의 어두운 습관, 구차한 변명, 그게 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야. 도망치지 않고 맞서는 순간, 비로소 그 오래된 숙제는 끝나고, 영혼은 한 단계 더 성숙해지거든.”

빛이 말을 이었다.

“삶이 제공하는 경험과 가르침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환생하다 보니 통찰력도 키우지 못하고 전과 같은 상태로 의미 없이 시간만 축내게 된 것이지. 성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지닌 잠재력에 비해 너무나도 더디게 성장하는 거지.”

J는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짊어진 숙제, 이제는 미루지 말고 풀어야겠다. 그게 내가 태어난 진짜 이유며 임무야!’

들녘의 바람이 서늘해지며 두 사람의 땀을 식혀주었다. 멀리서 아이들이 잠자리를 따라다니며 뛰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전 25화영혼을 세우는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