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으니 알고 싶습니다.

by 정강민

자주 다니는 도서관 근처에 산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산 입구까지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어제 에너지를 투입해서 그런지 오늘 오전은 영 집중이 안 되어 어슬렁거리다 산 입구까지 갔습니다. 평일 오전 사람이 많지 않아 조용하더군요. 먼지 터는 기계에 두 분이 있습니다. 취~~ 하는 바람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저도 신발도 털고, 옷도 텁니다. 산을 오르지도 않았는데 먼지 터는 제 모습이 좀 어색합니다. 저를 쭉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산도 오르지 않았는데, 먼지를 왜 털어요?’ 라고 할 것 같습니다.


근처 인디언집 체험장도 있네요. 아이들이 있어야 하는데, 평일이라 아무도 없습니다. 인디언 집은 나무를 원뿔형으로 세워 놓았습니다. 괜히 저는 들어가 봅니다. 제 이런 모습을 저 멀리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인디언집 옆에는 녹색 잔디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녹색잔디는 언제나 좋습니다. 잔디밭 끝 벤치에 어떤 아저씨는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얼핏 봤을 때는 책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와~~ 이런 화창한 야외에서 책을 보는 분이 있구나!’ 근데 자세히 보니 책이 아니고 핸드폰이었습니다. '아저씨가 책을 보고 있었다면 더욱 멋진 그림이었을 것 같은데........,' 아저씨 바로 옆에는 하얀색 조그만 강아지가 엎드려서 아저씨만 망부석처럼 바라봅니다. 간식을 주던지, 자신을 바라보던지, 이동하던지........이 세 가지 중 하나를 하라는 눈빛입니다.


산 입구에 1시간 정도를 보내고 내려와서 도서관 입구로 들어가려는데 문뜩 이상합니다. 요즘 거의 매일 와서 하루 종일을 보내는 곳인데, 뭔가 익숙하지 않은 느낌입니다. ‘이 느낌 뭐지?’


왜 이렇게 감정이나 느낌은 변할까요? 독서모임의 주제인 ‘왜 알고 싶어 할까?’와 연결해보려고 이 글을 씁니다.

왜 우리는 알고 싶어 할까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모른다고 느낄까요? 어제의 감정이 오늘은 변해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감정이 어제는 심각했는데, 오늘은 환합니다. 왜 이렇게 수시로 변하는지 우린 잘 모릅니다. 어쩌면 모른다고 느끼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인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철학자들이 이 대목에서 많은 말을 해놓았습니다. “그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당신이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을 알면 그건 알고 있는 거라고!”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자신의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까지 갈 수 있습니다.


왜 알고 싶어 할까요?

답답하기 때문입니다. 우린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지도가 인류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은 어디고, 그 마지막 뒤에 또 어디를 가는지 알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렵기도 하고, 시간을 투자해도 답을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식하기도 어려운 근원적 모름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두려움이기에 말하는 것 자체도 두렵습니다. 이 두려움은 죽음과 죽음 후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린 알고 싶어 합니다. 이 근원적 두려움을 이겨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버드 대학에 무향실이라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완벽하게 소리가 차단된 공간이라고 합니다. 여기 들어가면 두 가지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인데, 높은 소리는 자신의 신경계가 돌아가는 소리고, 낮은 소리는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는 순간, 피가 흐르는 소리도 있구나! 인간이 들을 수 없다고 소리가 없는 게 아니고, 우리가 볼 수 없다고 대상이 없는 것도 아니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아주 단편적인 몇몇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수많은 모르는 것들 위에 조금 튀어나온 것일 뿐입니다.


몽테뉴는 평생을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무지의 자각이야말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는 가장 아름답고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을 평생 의심하며 자신을 실험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삶에서 가장 크게 의심했던 것은 무엇인가요? 앎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의심했던 것부터 나열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씩 격파하며 명료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감정은 수시로 변합니다.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달라졌다는 것, 변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쁨에서 괴로움으로 또 즐거움으로 그리고 슬픔으로....... 이렇게 변하는 건 죽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린 변합니다. 슬프게 변하든 즐겁게 변하든 변화하는 건 괴로움입니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도 ‘사는 건 고통’이고 했지 않습니까.


익숙한 도서관 입구가 낯설게 보이기도 하고, 매일 다니는 길도 가끔 다르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내 감정이 어제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살아있으니 알고 싶습니다. 삶과 동반하는 그 고통은 즐겁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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