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나만의 문화'가 있습니까?

by 강호

중고등학교 시절 저는 항상 남의 뒷마당을 기웃거리듯 친구들의 취향을 부러워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배구를 잘하던 ‘마징가’라는 별명의 친구가 있었는데요, 서양 백인 같은 생김새에 키가 훤칠한 친구가 어느 날 팬플룻을 들고 나타나 ‘외로운 양치기’라는 죽여주는 곡을 연주했던 때의 문화적 충격은 정말 잊히지 않습니다. 저는 그때 그 친구가 너무나 부러워서 정말 시간이 없던 재수 시절 기어코 팬플룻 학원에 등록하고 말았습니다. 대학입시를 위해 내달려야 할 그 소중한 시절에 종로에 있는 학원에 팬플룻을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 배움은 결국 몇 달 못 가 비싼 팬플룻 악기 하나를 남긴 채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지금도 빠듯한 형편에도 재수 비용을 대주셨던 부모님께 너무 죄송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취향과 문화를 질투와 부러움에 휩싸여 이것저것 뒤따라하는 것은 그 이후로도 한동안 반복됐습니다. 그 결과는 언제나 허덕댐 뿐이었습니다. 지속은 안 되고 내 것은 남지 않았습니다.


문화와 취향의 영역에서만큼은, 다른 취향을 가진 누군가에 대한 비방은 자신을 인정하라는 폭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이들은 문화와 취향의 영역에서는 폭력적인 화법을 폭력적이라 생각 안 하고 던집니다. "이런 영화도 안 봤냐?" "요즘 누가 그런 옷 입고 다니냐? 촌스럽게" "노래 스타일이 너무 올드해. 듣는 음악도 구려." 젊을 때는 슈퍼 울트라 내향적 성격이었던 제게 꽤 상처가 됐습니다. 간혹 그 상처의 아픔이 이상한 방식으로 터져 나와 다른 이들을 상처 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유치한 인정 욕망과 잘난척하고 싶은 허세 때문에 독한 말들을 쏟아내곤 했지요. 그때 상처 받은 동료나 후배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무신경한 이들의 그 폭력적인 화법에 맞서지 않고 복싱의 위빙처럼 슬쩍 흘려보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나이 듦이란 그래서 어떤 면에선 축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피하는 법을 터득하게 됨과 동시에, 인생은 결국 혼자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술잔을 서로 기울이고 평생을 함께 벗하며 살 것 같은 사람도 불과 몇 년만 소원하면 남처럼 멀어진다는 것을 겪어보았으니까요. 한때는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가 정말 1,2년 만에 그렇게 되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그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 했거든요. ‘남’이 내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그 당시에 느끼는 것보다는 훨씬 작았던 겁니다.


숱하게 듣던 그런 말들을 슬쩍슬쩍 흘려보내니 그제야 '내 것'이 보였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저는 남의 취향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게 됐습니다. 남의눈을 신경 쓰는 것보다 제가 좋아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을 찾아다니기에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조바심도 생겼습니다. 그런 자각이 생겼던 때부터 저는 제 자신의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 제가 행복해하는 명상서나 자기 계발서, 제가 좋아하는 운동인 태권도 등 나이 쉰의 아저씨가 즐긴다고 하면 사람들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저만의 취향을 혼자 외로워하지 않고 남의 눈 신경 쓰지 않으며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요즘도 다른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게 되면 대부분 상대방의 취향을 최대한 따르는 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때때로 지루한 설교를 듣거나 유치한 얼굴 붉힘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정도가 심한 상대인 경우, 빨리 만남을 끝내는 쪽이 낫습니다. 대신 저는 빨리 저의 동굴로 돌아와서는 저만의 문화와 취향이라는 제 은밀한 안식처에서 휴식을 취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만의 문화가 생겨났기 때문에 다른 분들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질 수 있게 됐던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저만의 문화를 찾아내고 향유하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들이 만든 문화를 강요당하며 소중한 저의 인생을 낭비할 뻔했으니까요. 사실 중년이 되기 전에 자신만의 취향을 찾고 자신의 취미를 찾아 누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만, 저녁마다 삼겹살에 소주를 걸치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세상사에 대한 부질없는 논쟁으로 열을 올리다가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술이 머리끝까지 차서 잠드는 하루를 보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얼마 동안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만의 문화를 가꾸어 갈 수 있을 거라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말이지요.


이 기회에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나만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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