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언가 시작하기 위하여
계기를 만드는 소비
"열 살 무렵입니다. 친척 아저씨로부터 예쁜 노트 한 권을 선물 받았죠. 그 노트를 글과 그림으로 꽉 채웠습니다. 너무 예뻐서 안 쓰고 안 그릴 수가 없었거든요. 내 문학의 시작은 아마 그때부터일 겁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오싱젠의 말입니다. 어떤 재능을 발휘하거나, 마음먹은 일을 시작할 때, 그 계기를 어떤 특별한 물건이 만들어 줄 때가 간혹 있습니다. 멋진 기타를 보고 기타리스트가 된 사람도 있고, 예쁜 펜이 좋아 글쓰기에 취미를 들이게 되는 경우도 있듯이 말이지요.
저는 언젠가부터 이런 걸 ‘계기를 만드는 소비’라고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다이어리부터 시작됐던 것 같습니다. 물론 쓰라린 실패의 경험이었습니다. 매년 다이어리를 사면 1월 한 달 열심히 쓰다가 그 뒤로는 어디다 뒀는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좀 어떤가요. 무언가를 시작하겠다는 마음다짐하나만으로도 삶에 생기가 돈다면 그리 아까운 돈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어이없고 말도 안 되는 소비가 어디 한둘인가요. 저는 결국 다이어리를 쓰는 습관이 생겼고 성인이 된 이후로는 메모를 습관화하게 되었으니, ‘계기를 만드는 소비’의 목적인 ‘계기’는 마련된 것이겠네요.
어쩌면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 간단한 물건을 구매하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노트 한 권의 구매가 여러분을 노벨문학상으로 이끌지도 모릅니다. 또 새 컴퓨터 한 대가 당신에게 세컨드 잡을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저의 욕망을 점검하고 꼭 하고 싶은 것을 정한 다음에는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멋진 도구들을 하나씩 골랐습니다. 일단 저는 글을 쓰면서 살고 싶었습니다. 제 글을 누군가가 읽고 도움을 받았다는 댓글을 보면 보람되고 뿌듯하고 기분이 무척 좋았거든요. 글을 써서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글쓰기를 멈추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멋지지 않나요? 내 생각을 글로 적는다는 것, 그리고 그 글을 다른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 말이지요. 그리고 글쓰기라는 행위를 둘러싼 달콤한 낭만성이 좋았습니다. 예쁜 카페에서 맛난 커피를 마시며 달콤한 이야기를 적어 내려 가는 즐거움 말입니다. 그리고 정신의 분주함에 비해 일상은 한없이 늘어지는 그 자유로움 역시 사랑스러웠다. 비록 저는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하루의 2/3 이상을 회사에 매여서 지내지만 언젠가는 그 자유로움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에게 스크리브너라는 앱을 선물했습니다. 그때는 이런저런 이유로 한동안 글을 못 쓰고 있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지요. ‘필경사’라는 멋진 이름의 저작도구였는데, 이 앱을 구매해서 제 맥북 에어와 아이패드, 아이폰에 깔았을 때 저는 아, 다시 글을 쓸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그토록 찾고 있던, 저에게 꼭 맞는 앱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설레는 만큼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시작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필요하지요. 저는 그중에 꽤 큰 요소가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오래 사용해서 손때가 묻은 도구, 내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책, 이런 것들 말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어려운 고비에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저는 어머니께서 제 대학시절 선물해주신 몽블랑 만년필이 그런 도구입니다. 뭔가 생각이 잘 안 풀릴 때 그 만년필을 꺼내 들면 그 만년필을 선물하신 어머니의 당부가 떠오릅니다. “좋은 글 많이 쓰거라.” 그러면 저는 다시 용기를 내어 쓱쓱 글감을 메모해 나가는 것이지요.(오해 마세요. 저의 어머니는 건강하게 잘 계십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계기를 만드는 소비로 우리의 영혼의 도구를 장만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그 도구 덕에 시작이 즐거워진다는 점이고, 그 도구 덕분에 매일매일의 일상이 즐거워진다는 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소비의 세계에서 진정한 소비를 만나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