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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호 Aug 07. 2020

결국 잘해야 쉴 수 있다.

- 워라밸에 관한 단상

저는 군대 시절 행정병이었습니다. 신병 훈련이 끝나고 부대를 배치하는 시간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뭔가 자격증이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불려 나갔습니다. 중장비를 몰 수 있는 사람,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 건축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 불려 나갔지요. 아무런 기술이 없었기에 저는 거의 마지막까지 남았습니다. 훈련 조교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내게 놀리듯 알려줬습니다. 이제 아주 '힘든' 포병 부대와 아주 '여유로운' 행정병으로 가는 길이 남았다고요. 저는 제발 '여유로운' 행정병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덕인지 저는 '여유로운' 행정병으로 가게 되었지요. 


근데 행정병으로 가보니 여유로운 것이 좋은 게 아니더군요. 그때 저는 '야근'을 경험했고, '마감'을 체험했습니다. 변덕 심하고 디테일만 잡아내는 '상사'도 만났고요, 승진에 목을 매는 '간부'도 보좌해야 했지요. 타 부서와의 '협업'도 체험해봤고요. 일종의 회사 체험을 한 건데, 같은 조건이라면 정신적인 노동이 육체적인 훈련보다 장기적으로는 훨씬 고되다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늘 일이 산적해있어서 대부분의 훈련에서 열외 되었습니다. 저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유격 훈련을 받으러 가는 '미친 짓'을 한 적도 있었지요. 물론 그때마다 선임하사가 찾아와서 행정사무실로 데려가곤 했지만요. 


그때를 생각해보면 사무직 노동자의 워라밸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육체적인 노동은 일하는 시간과 휴식시간의 경계가 명확합니다. 땀 흘려 노동하고 일터를 떠나면 더 이상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때의 워라밸은 그래서 작업시간을 적절하게 안배하면 워라밸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원리상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실제는 많이 여건이 다르겠지요.) 그런데 정신적인 노동을 하는 사무직 노동자는 경우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하루 8시간의 근로시간을 엄수하고 퇴근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만으로 워라밸이 유지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혹시 그런 경험 해보신 적 있지 않나요? 금요일 저녁 다 끝나지 않은 일감을 갖고 퇴근했다가 주말 내내 꺼내어 보지도 않고 월요일에 고스란히 들고 온 경험이요. 제가 출판사에 근무할 땐 정말 매주 이랬던 것 같아요. 교정 보던 원고를 집에서 주말 동안 어느 정도는 해서 올 거라고 '바리바리' 싸 짊어지고 갔지요. 그래야 마감시간을 간신히 맞출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요. 그랬다가 결국 주말 내내 뭉기적거리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월요일에 출근하는 거죠. 제대로 쉬거나 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일도 제대로 못한 그 찜찜한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결국 사무직 노동자는 강철 멘털이 아닌 다음에는 업무시간을 아무리 8시간으로 맞춰놓고 칼퇴근을 하더라도 워크 라이프 밸런스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날 일이 그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 단위로 일이 돌아가고 그 결과와 퍼포먼스에 대한 책임 때문에 매일매일의 일이 이어지거든요. 그래서 항상 머리 위나 어깨 위에 커다란 돌덩어리를 올려놓고 다니는 것 같지요. 게다가 항상 업무에 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놀고 있어도 한쪽 머리는 언제나 업무의 문제 해결을 위해 늘 작동하고 있는 겁니다. 잘 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꿈틀거립니다.(보통 그걸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하죠^^)


저는 그래서 업무를 시간 단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큰 프로젝트 속의 제 일을 쪼개고 쪼갠 다음, 일단위로 그 일을 부과합니다. 그런 다음 그 일을 끝내면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겁니다. 생각보다 이런 방법은 효과가 큽니다. 저는 이걸 일을 미분한다고 말해요. 미분된 일을 'task앱'에 기록하고 끝내면 체크해서 시각적으로 일의 결과가 보이게 합니다. 그제야 머리와 마음이 쉴 수 있습니다. 그래야 방전되지 않습니다. 


사무직 노동자는 그래서 워크 라이프 밸런스를 제대로 누리려면 일을 계획하면서 잘게 쪼개고, 프로젝트 일정에 맞게 일별 업무로 부과하고, 그 업무를 능숙하고 빠르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능력 없이 하루 업무시간만 줄이면, 사무실에서 할 일을 카페나 집으로 들고 가는 것일 뿐, 진정한 워라밸을 유지하기 어렵지요. 


하여 결국 워라밸을 위해서는 일을 잘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성과물은 몰라도 덩어리 진 일을 잘 쪼개고 계획적으로 매일매일의 시간에 분산 배치하는 역량은 키워야 합니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는 상태'를 벗어나서 '할 때 팍 하고 쉴 때 푹 쉬는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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