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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호 Aug 11. 2020

사진을 찢으며

- 10년 후 사진첩에 담길 앞으로의 10년을 위하여 

주말 동안 책상 안에 모여 있던 사진들을 정리했습니다. 놀랍게도 고등학교 졸업식 때부터 직장 초기 시절까지의 사진이 모여 있더군요.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제 생활에 디지털 사진이 스며든 건 아이폰을 처음 가졌던 2008년부터였던 것 같네요. 


사진을 한 장씩 넘겨봅니다. 고3 때 호랑이 같았던 담임 선생님과 교련 선생님이 보이네요. 초등학교 때 아주 친하게 지냈지만 고등학교가 되어서 점점 서먹해져 버린 친구와 어색하게 함께 찍은 졸업사진도 있고요. 대학 입학식 날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대학 동기들과 MT를 갔던 사진, 친구들과 유럽 배낭여행을 갔던 모습도 있었고요. 그리고 대학교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이 펼쳐졌습니다. 대학 졸업식, 그리고 대학원 졸업식. 첫 직장 동료와 마라톤을 뛰었던 사진을 마지막으로 오프라인 사진은 멈춰 있었습니다. 


사진의 환기력은 놀랍습니다. 금방 그 시절로 마음이 휙 날아가더군요. 고등학교 졸업식 때의 그 침울함을 기억합니다. 원하는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해야 했거든요. 졸업식이 졸업식 같지 않았지요. 아주 솔직히 말하면 제 인생이 엄청 꼬였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표정이 씁쓸하더군요. 반면에 대학 동기들과 MT를 갔던 사진들 속의 제 표정은 밝고 희망차고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의 표정이랄까요. 보면서 괜히 제 마음이 그때의 기대로 달떠서 콩닥거리는 듯했습니다. 


삶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니 그냥 정겨웠습니다. 온통 먹구름 낀 인생을 산다고 느꼈던 제 자신이 지금 보니 귀엽습니다. 뭘 그깟 걸 가지고, 이런 말을 건네고 싶었어요. 또 완전 장밋빛 희망으로 지내던 대학 1학년 때의 제 자신에게는 '삶이 그리 만만하진 않아'라는 충고를 해주고 싶었지요. 


놀라운 건, 지금으로부터 2~30년 전의 사진들인데 바로 얼마 전인 것 같다고 느낀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수십 년 전의 추억들이 모두 어제일 같다던 게 이제야 절실히 공감이 됩니다. 분명 제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작용이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 감각들을 다시금 챙겨보게 했겠지요. '노화'라고 하는 화학작용 말입니다. 


고등학교를 떠나면서 마음속으로 '매년 선생님들을 찾아뵈어야지' 했었습니다. 친구들에게도 '틈나는 대로 연락할 거야' 다짐했고요.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는 속으로 '나중에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이 친구들 데리고 다시 한번 유럽으로 떠나야겠다' 마음먹기도 했었습니다. 첫 직장에서 마라톤을 뛰면서는 '이 회사를 내 손으로 크게 키워 신입직원들을 이끌고 마라톤을 해야지.' 그랬었지요.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의 다짐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사진 속의 그들이 그립지만, 그들과의 사이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었듯이, 시간의 풍화작용에 따라 우리의 관심과 목표와 행동이 달라지니 당연히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겠지요. 그나마 다행인 건, 후회는 없었다는 겁니다. 다소 겸연쩍고 민망하긴 해도 그 시절 시절을 잘 살아냈다는 마음이 들어 살짝 기뻤습니다. 


이제 그 사진 중에서 꼭 남기고 싶은 사진 몇 장을 남기고 찢는 중입니다. 지난날에 조금씩 얽혀있는 마음들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야 미래로 더 달려갈 수 있지요. 아주 가끔 몇 장의 사진들로 지난 시절을 환기시킬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10년 후의 사진첩에는 앞으로의 10년이 담길 테니까요. 그 시절 사진들을 더 행복하게 살펴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사진을 찢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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