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정'에 관하여
김상득 씨의 ‘행복어사전’이라는 연재 칼럼을 읽다가 동네 지식인 ‘안다 형’(어떤 화제에 대해서도 '나 그거 알아'라고 하며 아는체 한다고 해서 안다형이랍니다)이라는 인물을 발견했을 때 저는 어렸을 때 살던 불광동 연신내 골목길의 여러 형들이 떠올라 미소 지었습니다. 어릴 때 그 형들은 대단했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었고 무서운 게 없어 보였거든요. 저보다 두세 살 위의 형들은 제 또래들을 모아 놓고 더 넓은 세상(그래 봐야 초등학생이 모르는 중학생의 세계지만요.)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늘어놓고 했습니다. 속칭 ‘뇌피셜’(그냥 ‘자신의 논리적 추측이나 상상’이란 뜻)을 잔뜩 붙여서 말이죠. 저는 그런 형의 말을 입을 쩍 벌리고 듣고 집에 와서는 온갖 상상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럴 때면 동네 형들이 마치 진짜 ‘히어로’처럼 느껴지곤 했지요. 하지만 나이를 한 두 살 더 먹고 제 또래들이 순진함을 벗어던졌을 때 그들은 아주 평범하디 평범한 ‘동네형’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동네형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저는 대학에서 만났습니다. 입시 공부에 시달리며 세상사에 담을 쌓고 살다가 대학 입학 후에 해일처럼 밀어닥친 자유와 무료의 시간을 저는 부끄럽게도 술을 마시는데 대부분 쏟았습니다. 그 신입생들 앞에 ‘술자리의 제왕’ 선배들이 나타납니다. 목소리는 크고 허세가 심합니다. 천재인 척하기도 하고 세상사의 고민을 모두 짊어진 척 하기도 하지요. 말로는 만리장성을 쌓고 학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세상을 모두 바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습니다. 그 ‘제왕’들은 졸업과 함께 급격하게 평범해진다는 것을요.
사실 저는 ‘동네형’들과 ‘술자리의 제왕’들에 대해서는 조금 아는 편입니다. ‘히어로’나 ‘제왕’ 취급을 받지는 못했지만 저의 행태는 그들과 비슷했었거든요. 그 심리는 ‘서푼짜리 인정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습니다. 한두 살 어린 친구들의 감탄과 경외가 담긴 말과 표정을 얻기 위해 그들을 먹일 술값과 성장을 위해 투여했어야 할 에너지를 오랜 시간 쏟아부었던 것입니다. 현명한 친구들이 자신의 꿈을 위해 땀 흘려 노력했던 그 시간에 말이지요.
허나 동네형들이나 술자리의 제왕들은 젊고 순수하고 가능성으로 충만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으레껏 등장하는 낭만적인 인물들입니다. 그들도 순수했고 그들을 추종했던 우리들도 순수했으니까요. 지금 만나면 모두가 장삼이사 평범한 사람들이 되어있지만 젊은 시절의 양념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직장에서 만나게 되는 ‘꼰대’의 경우는 다릅니다. ‘서푼짜리 인정’에 목말라 있다는 점은 동네형들과 술자리의 제왕들과 비슷하지만, 그로 인해 비롯되는 갑질과 폭언은 ‘낭만’과는 거리가 멉니다. 꼰대에게 시달리는 직장인들 역시 이제 낭만의 시대를 지난, 더 이상 순진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생활인이니까요.
저는 동네형이기도 했고 술자리의 제왕 비슷한 역할을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어떻게 해서든 ‘꼰대’처럼 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더 젊게 보이려 하고 더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말을 줄이고 지갑을 열려하고, 웃고 친절하려 합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값싼 인정에 목말라하지 않고 정말 스스로를 값비싼 보석처럼 연마해 나갈 때 진짜로 꼰대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요.
늘 인정에 목말라 할 수밖에 없다면, 진짜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세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그리 하려 애씁니다. 모두들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