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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호 Jan 15. 2021

이미 가진 물건에
나만의 세월을 입힌다

- 철학 교사의 생활 철학

출판계에서 일할 때 인문 베스트 저자로 손꼽히는 중동고 철학교사 안광복 선생님에 관한 기사를 갈무리해 둔 적이 있었는데, 그 파일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분이 소개한 습관이 맘을 잡아끌었었습니다. 이름하여 ‘탈탈 터는 습관'입니다. 가령 이런 식이지요. 입고 나갈 옷이 마땅치 않으면 옷장을 샅샅이 뒤지고 먹거리가 애매하면 냉장고를 탈탈 털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수많은 옷과 먹거리들이 나오는 것이지요. 읽을 만한 책이 없는 듯하면 온라인 서점에서 신간을 뒤지는 대신 읽지 않은 책이 그득한 책장을 뒤지고요. 이런 걸 그분은 탈탈 턴다고 표현합니다. 특히 원고 마감이 코 앞인데 쓸거리가 없으면 옛 노트와 메모도 탈탈 터는 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쓸 만한 것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런 습관은 IMF 사태 이후에 생겼다고 합니다.  외환위기로 소득이 반토막 나자 새것을 쇼핑하는 것은 언감생심 남의 일이 됐던 것인데요. 보통 그럴 때 인간은 철학을 바꿈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더 이상 무리하게 새 상품을 탐하기보다 이미 가진 것 중에 쓸만한 것들을 추려내 나만의 세월을 입히자는 생각의 전환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묵은 물건을 쓰는 자신이 창피하고 서글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손때가 묻은 물건에 한없는 정이 갔다는군요. 웬만하면 그 물건들은 그와 함께 십수 년을 살아내면서 십여 권의 책과 수많은 칼럼들을 만들었습니다. 안광복 선생님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것이겠지요. 


새것, 비싼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주변에 있던 물건에 세월을 덧입히기로 한 그때부터 그분은 풍요로웠고 행복해졌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마음가짐이 되어 갑니다. 조금 더 젊었을 때는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 세상에서 패배하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처럼 보여 마뜩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됩니다. 나이 듦의 장점이지요. 대신 보다 제 자신에게 맞는 삶을 가꾸어 가고 싶습니다. 물건을 늘려갈수록 마음이 좁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물건을 줄여 마음을 넓히려고 합니다. 


그동안 저와 함께 해왔던 물건들을 둘러봅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물건들이 보이네요. 그걸 저만의 빈티지로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삶에 여유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에 살짝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듯합니다. 


(조선일보 2013.1.7. <2013년 신년기획 행복 노트 (5) 철학교사 안광복_나만의 빈티지 만들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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