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호 Aug 02. 2021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것

- 그래야 채울 수 있다

저는 논산 훈련소에서 신병 훈련을 받았습니다. 대한민국 젊은 남성이라면 누구나 가는 군대였지만, 당사자가 되어 보니 제 젊음이 스물두 살로 입대와 함께 끝나는 것 같은 절망감이 느껴졌었지요. 입대 전 몇 개월을 그런 마음으로 지냈던 것 같네요. 군생활을 잘 해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3년을 썩을(그때는 군입대를 '3년 썩는다'라고 표현했지요. 지나고 보면 꼭 단점만 있었던 건 아닌데요.) 생각을 하니 공연히 울분도 느껴졌습니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그런데 훈련소는 그런 모든 걱정이나 불만, 울분 등등을 일거에 제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훈련소의 조교들은 대형 연병장에 예비 훈련병들을 불러 모아 줄을 세운 다음 천천히 내무반이 있는 막사로 이동을 시키는데, 배웅 온 가족이나 친구가 안 보이게 되는 지점부터 조교의 목소리와 말투가 바뀝니다. 가족 친지가 있는 연병장에서는 훈련병에게 다소 친절하고 나긋하게 존대법을 씁니다. 


- 잘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사열 종대로 줄을 서겠습니다. 훈련병 여러분들은 앞사람과 줄 간격을 맞춰서 도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다가 막사 근처로 오면 목소리가 커지고 말투가 180도 바뀌지요. 


- 동작 봐라, 이 xx들이. 놀러 왔어? 줄 똑바로 맞춰! 이빨 보이지 마! 웃어? 앞으로 취침. 일어서. 뒤로 취침. 일어서. 차렷. 지금부터 사제(민간인 시절)는 잊는다, 알았나?


한순간에 사람들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이런 과정을 거쳐 민간인 강 oo은 삽시간에 훈련병 402호가 되는 거였습니다. 훈련병 402호가 되는 순간 세상에서 나 자신을 증명해주던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사는 동네도, 출신 학교도, 다니던 기업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얼마나 빨리 철조망 밑을 길 수 있는지, 얼마나 정확하게 사격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동료들과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는지 등이 중요할 뿐이었습니다. 초코파이 하나에 기뻐할만큼 자신이 하찮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훈련 몇 시간에 스스로의 한계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겸손을 배우게 됐습니다. 배움은 그때부터 시작됐고요. 


제대를 하고 직장에 들어가서 제가 직장에 적응해보고 새로운 신입직원을 여러 번 받아보면서 깨닫게 됐습니다. 신병훈련소에서 가르치는 것 중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요. 그건 아마도 '자신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신병 개개인에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일 겁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가방끈이 긴 사람도, 명문 대학을 졸업해서 학벌이 좋은 사람도, 고등학교 졸업 후 사업을 해서 꽤 성공한 젊은 사장도 이름 대신 번호로 불리는 순간 어리바리하고 모든 게 새롭고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신병'이 됩니다. 그제야 무언가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겠지요. 


우리네 인생이 그렇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내려놓지 않으면 새로운 과업이나 업무를 전수받기 힘듭니다. 조금만 무언가에 익숙해지면 '나는 이런 대접받을 사람이 아니다', '나의 워크 라이프 밸런스는 어쩌라고?' 등등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고, 회사를 입사하기 전의 그 절실하고 간절했던 마음을 어느새 잊게 됩니다. 우리의 자존감이나 '워라밸'은 소중합니다. 그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주기적으로 자신을 비워내고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때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심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 그런 의미 아닐까요. 



작가의 이전글 우리는 조용히,현기증 나게변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