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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호 Apr 26. 2022

마음의 칼을 벼리며
시대를 건너뛴 우리 시대의 고수

- 이외수 론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꽤 오래전 어느 잡지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1. 


살아남는 비결 따위는 없어. 하악하악.

초지일관 한 가지 일에만 전심전력을 기울이면서

조낸 버티는 거야. 하악하악.

그러니까 버틴다는 말과 초월한다는 말은

이음동의어야.


‘꽃노털 옵하’ 신드롬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떴다.


“다행스럽게도 보름달이 먹구름 속에서 해맑은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오늘 밤 달을 보고 이태백으로 변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아니면 늑대인간으로 변하는 사람이 더 많을까요?”


또 이런 말도 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는, 내 심보와 내장이 불량하기 때문이지 사촌이 잘못해서가 아니다. 제기럴, 아니꼽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하자.”


이런 문장들에 물경 삼십팔만삼천사백두명의 팔로워들이 열광한다. 그가 유명 서점에서 사인회를 열면 다섯 살짜리 꼬마부터 길게 줄을 늘어서서 그와 포옹을 나누고 사인을 받는다. BBQ나 하이트 맥주 같은 유명 브랜드에서도 이름난 배우와 탤런트를 제쳐두고 그를 통해 제품을 선전하고자 한다. 유명한 가수와 연예인들은 기꺼이 정성과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나고자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 화천군 감성마을로 향한다.


바로 그가 자칭 타칭 ‘꽃노털 옵하’로 불리며, 이 시대의 ‘기인’으로 칭해지는 감성마을 촌장 소설가 이외수다. 책 안 읽기로 유명한 우리 대한민국의 독자들은 그의 어떤 점에 반해 그에게 열광하는가? 그는 왜 그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이는 분명 ‘분석’을 요하는 ‘현상’ 임에 분명하다.


그의 ‘정체성’은 ‘소설가’다. 그의 트위터 소개글에는 분명 ‘화천군 감성마을 소설가 이외수’라고 밝혀져 있고, 그가 [하악하악][아불류 시불류] 등의 잠언집으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이전에도 분명, 그는 40-70만 명 이상의 열혈독자층을 거느린 베스트셀러 소설가였기 때문이다.


아무나 트위터를 통해 위에 언급된 문장을 날린다고 사십만 명의 팔로워가 따라붙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게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냐는 반응과 함께 ‘언팔’(팔로우를 끊음) 당하기 십상일 것이다. 무릇 잠언류의 글에는 ‘후광효과’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그 ‘후광효과’는 단순한 ‘인기’나 성공스토리로는 오래갈 수 없다는 점도 분명하다. 아주 오래도록 곰삭은 ‘그 무언가’가 있어야만 비로소 읽는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고 울림을 줄 수 있다. 이 글은 그의 소설들을 무작위로 들추며 바로 ‘그 무언가’를 찾고자 한 시도다.


요리사는 자신의 요리로 모든 것을 말하고, 학자는 자신의 학문으로 모든 것을 말한다. 소설가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소설 속에는 그가 살아왔고 추구했고 생각했고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감히 추측건대, 지금 그의 글을 읽으며 이외수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소설에 담겨있는 이외수의 생각과 가치와 철학과 삶의 자세에 공감하기 때문에 그를 ‘팔로우’하는 것이리라.


2.


무엇에건 패배하고 싶지 않았으며

무엇에건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발붙인 이 황무지에서,

이 냉혹한 사람들과 기계들과 돈의 시대에서,

아버지가 겪었던 그 무서운 고독까지 모두 짊어지더라도

나는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버림받은 내 살과 뼈를 녹여

또 하나의 빛나는 훈장을 가지고 싶었다.


마음을 비우기 전 내장이 먼저 비어 있었던 시절


이외수의 소설에 대해 말하기 위해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소설은 역시 1975년 ‘세대’지의 신인문학상을 받은 중편 [훈장]이다. 그가 [날다 타조]라는 에세이집을 개작해서 세상에 내보낸 [청춘불패]의 가장 첫머리 부분에 [훈장]은 ‘나의 데뷔작’이었고 ‘내가 겪은 유년의 비극을 바탕으로’ 씌어졌다고 밝혀놓았다. 그 이전에 어느 지방신문을 통해 등단한 바 있지만, 작가 본인이 데뷔작이라고 칭하는 소설에는 그 소설가의 원점 같은 것이 놓여있기 마련이고, ‘유년의 비극’을 바탕으로 씌어졌다면 더더욱 ‘원점’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내 아버지의 별명은 미친개였다’로 시작한다. 동시대의 다른 작가들의 소설들이 ‘내 아비는 빨치산이었다’로 시작되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매우 다른데 바로 이점이 소설가 이외수를 다른 작가와 구별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또 수십만의 독자를 거느린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도 문단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작가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문단에서 문제적 작가로 인정받는 서두는 단연 ‘내 아비는 빨치산이었다’ 여야 했다. 그런 선명한 깃발은 그 작가의 작품세계가 당대의 시대정신인 이념과 체제, 그리고 역사를 아우르고 있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슷하지만 다른 ‘내 아버지의 별명은 미친개였다’는 그의 작품세계가 이념과 체제, 그리고 역사가 아닌 고통과 위안, 그리고 구원으로 이어지게 했고, 그 구원이 대다수의 작가들이 다루는 복수와 용서와는 다른, 구도와 초월로 향하게끔 했기에 의미심장하다.


훈장의 1부 ‘묵은 일기장’은 상이군인인 아버지의 패악에서 비롯된 ‘질식할 것 같은 패망의 가옥’에서 버텨내는 이야기다. 그의 아버지는 6.25 때 한 팔을 잃은 상이군인으로 틈만 나면 과거 군인 시절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그때의 무공으로 받은 ‘훈장’을 보듬고 사는 인물이다. 그런 한편 한 손으로 화투장을 마술사처럼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도박의 ‘고수’이기도 하다. 화자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질식할 것만 같은 패망의 가옥’ 시절을 보낸다. 툭하면 원산폭격에 손찌검이 날아오고,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에 대한 열정은 ‘환쟁이’라 비하된다. 계모에게는 극도의 의처증으로 학대를 일삼을 뿐이다. 그 아버지 밑에서 버티는 방법은 교회에서 헌금을 훔치는 위악, 그리고 계모와 함께 집에 들어온 여동생 인영이를 바라보는 위안뿐이었다.


마침내 계모도 아버지의 패악에 못 이겨 화자의 유일한 위안이었던 여동생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지자, 화자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아버지의 훈장과 돈을 훔쳐 달아난다. 그 결과로 날아온 소식은 아버지가 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살했다는 비극적인 사실이었다. 뒤에 화자는 깨닫게 된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잔혹한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 아버지가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위안은 계모에게서 나왔다. 그 계모가 사라졌을 때, 화자는 아버지의 과거의 위안거리인 ‘훈장’과 미래의 희망인 ‘화자 자신’을 함께 훔쳐서 도망쳤던 것이고, 그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위안과 안식과 희망을 빼앗겨버린 아버지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죽음’이었다는 것을 그가 자신의 절망과 고독을 바닥까지 겪었을 때 깨닫게 된다.


분노와 용기 그 이상의 것을 찾아서


훈장의 2부는 화자가 아버지만큼의 절망과 고독을 겪는 과정의 기록이다. 가장 처절하게 가슴앓이를 해본 사람은 타인의 절망과 고독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고 할까. 화자는 남춘천 역으로 천천히 들어서는 열차 속 ‘얼굴이 갸름하고 무척 슬프게 생긴 여자가 은은한 불빛에 젖어서’ 내다보는 모습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폐를 앓다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해 소양댐에 수국을 들고 찾아온 사내의 슬픔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끝에 ‘이 세상에서 가장 철저하게 불행했고, 가장 철저하게 고독했던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식어 가는 새벽 형광등 불빛에서도 순금의 광채로 번쩍이고’ 있는 아버지의 훈장을 부드러운 헝겊으로 닦는 것은 ‘일종의 화해’의 순간이자 내면적인 승화의 순간이다. 이제 아버지가 드리운, 혹은 드리웠다고 생각했던 절망과 고독과 불행을 철저히 자기 몫으로 돌리고, 그것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길만이 남았다.


훈장의 제3부 환생집에는 이외수의 세계관 중 이후 소설들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장면이 나온다. 복학생 노철환과 화자인 임원일이 데모에 참여하라는 동급생들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 때문에 린치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화자는 ‘우리들의 이상이 아무리 절대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의 투쟁이 아무리 순수하고 정의롭다 하더라도, 우리들의 밖에서 현실은 현실 스스로를 조금도 파괴당하지 않고 오히려 냉혹하게 우리들을 파괴하면서 차츰차츰 제 나름대로 형성되어 가고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분노와 용기만으로는 그 무엇도 이룩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분노와 용기 그 이상의 것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독백한다.


이 대목은 이후 장편소설 [괴물]에서 한길서라는 천재 시인이 대학에서 겪은 폭력을 묘사한 대목에서 다시 한번 변주된다. 한길서의 시적 재능을 학생운동에 활용하고자 하는 선배와 동료들은 그에 거부하는 한길서를 폭력으로 린치하는데, 결국 그 모습은 거대한 국가폭력이나 그에 저항하기 위한 폭력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비친다.


폭력은 폭력으로 바로 잡을 수 없다는 것, 이런 세계관은 그의 또 다른 장편소설 [칼]에서 또 한 번 변주된다. 이문열의 [필론의 돼지]와 매우 유사한 장면이다. 주인공 박정달 씨와 그의 조수인 정 군은 처삼촌 댁으로 가는 열차에서 몇 명의 부랑한 청년들에게 폭력을 당한다. 그때 구세주처럼 한 청년이 나타나 놀라운 솜씨로 불량배들을 해치우지만, 작가는 주인공 박정달 씨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놈도 폭력 하나만 믿고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야. 그놈은 나쁜 놈들을 물리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자기의 세력권을 침해당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을 뿐이야. 만약 일을 저지른다면 더 큰 일을 저지를 놈이었네.’ 폭력적인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화두에 대해 소설가 이외수는 이후 작품에서 자기만의 해결책을 향해 나아간다.


살과 뼈를 녹여 얻은 빛나는 훈장


훈장의 화자가 ‘분노와 용기 그 이상의 것’으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그림’이었다. ‘프러시언 블루와 암바 계열로 혼합시켜 만들어낸 어두운 색깔의 거대한 아버지의 얼굴’ 같은 바위산 위에 ‘고독을 정복하고 홀로 바위산에 오른 고고한 모습’을 한 승냥이가 그려져 있는 그림, 홀로 방 안에 틀어박혀 코피를 흘려가며 토해낸 그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화자는 비로소 행복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그림 옆에 아버지의 훈장을 나란히 걸 수 있었다. 화자는 비로소 거대한 아버지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방황과 고독과 고통에서 스스로를 구원해 낼 도구를 얻었다. 바로 ‘예술’이라는 이름의 구원이었다.


소설가 이외수는 중편 [훈장]에서 ‘무엇에건 패배하고 싶지 않았으며 무엇에건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발붙인 이 황무지에서, 이 냉혹한 사람들과 기계들과 돈의 시대에서, 아버지가 겪었던 그 무서운 고독까지 모두 짊어지더라도 나는 쓰러지고 싶지 않았다. 버림받은 내 살과 뼈를 녹여 또 하나의 빛나는 훈장을 가지고 싶었다’라고 썼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빛나는 훈장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꿈꾸는 식물][들개][칼][벽오금학도][황금비늘][괴물][장외인간] 등 소설(예술)이라는 훈장을. 그리고 또 하나의 빛나는 훈장을 얻었다. 그것은 그가 그 누구보다도 극심했던 젊음의 방황과 궁핍과 외로움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낸 자가 되었다는 것, 치열하게 자기 자신과 싸워 궁핍과 절망과 빈곤을 이겨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빛나는 훈장이다. 이로 인해 그가 하는 모든 말과 그가 쓴 모든 글은 ‘후광’을 지닌다.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것이다’라는 말을 장삼이사가 말하면 개풀 뜯어먹는 소리가 되지만 이외수가 말하면 하나의 잠언으로 각인되는 이유다.


3.


포기하지 말라.

절망의 이빨에 물어 뜯겨본 자만이

희망을 사냥할 자격이 있다.


‘장인의 유서’로서의 예술


사람들은 흔히 오해한다. 인간이란 매우 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또 그런 맥락에서 일정한 자극에 동일하게 반응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불의를 보면 맹렬하게 싸우고, 올바르게 바꿔야 한다고. 독재와 싸워야 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신해야 한다고. 역사는 그렇게 흘린 피를 통해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고. 또한 문학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신주의 속에서 불감증에 걸려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괴롭게 해야 한다고. 현실의 고통을 핍진하게 그려내지 않는 문학은 한갓 이야기이거나 전설, 민담일 뿐이라고. 그런 동일성에 대한 환상은 여러 방식으로 재생산되면서 한 시대의 사조를 이룬다. 우리 문학의 거대한 조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원대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삶을 투신하는 문제 말고도 갖가지 고통과 번민에 시달려 왔다. 이를 테면 ‘누군가 내 인생을 훔쳐가서 나 대신 살고 있는 듯한 느낌’에 시달리며 ‘한평생을 물거품만 거머잡고 살다가 허망하게 숨을 거두고 마는 듯한 느낌’으로 살아간다. 그것보다 더 원초적으로는 ‘사흘을 굶으면 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 밥을 짓는 집의 밥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칠 만큼 빈곤에 시달려 허덕대기도 한다. 고통과 번민에도 서열과 위계를 매기는 이들은 이를 가리켜 유치하다고 폄하할 수 있겠지만, 소설가 이외수는 그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바로 이런 평범한 독자들을 향해 그의 소설을 건네 왔다.


[들개]를 통해 작가는 그렇게 질식할 듯 돈과 직장, 먹이 문제에 묶여 고통스러워하는 독자들에게 한 예술가의 유서 같은 ‘작품’을 넌지시 건네준다. 삶의 허무함과 일상의 비루함 속에서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쥐고기를 뜯어먹을 정도로 처절한 궁핍 속에서 자신의 열정과 영혼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99마리의 들개 그림을 완성하는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장대 끝에서 극한까지 가보라고. 그러다 보면 ‘닷새 동안 꼬박 식음을 전폐하고 시를 쓰면 그 시가 완성되는 날 반딧불이 수천 마리가 모여들어 아름답게 난무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이외수의 예술관이 집약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은 자신의 열정과 영혼을 남김없이 불태운 ‘장인의 유서’ 여야 한다는 것.


이 주제의식은 장편[칼]에서 확장되고 변주된다. [칼]의 주인공 박정달 씨는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많은 종류의 힘들을 보아왔고, 그럴 때마다 언제나 옆으로 피할 줄만 알고 단 한 번도 정면으로 맞서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아주 작은 폭력 앞에서도 기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 사람. 굴욕감 때문에 혀를 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라도 공포와 불안감 때문에 어쩌지 못하는 사람, 그가 바로 주인공 박정달이고, 또한 우리 시대의 장삼이사의 모습이다.


그 나약한 주인공은 ‘신검’을 만들면서 삶의 의미를 찾고 변화한다. 그는 ‘신검’을 만들면서 자신의 가슴속에 묻혀 있던 보석 하나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이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각양각색으로 생활하고 있는데 아무리 쓰잘 데 없는 사람같이 보인다고 해도 반드시 남들과는 다른 보석을 하나쯤은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법’이라고. 집게질도 메질도 서툴렀던 주인공 박정달 씨는 ‘신검’을 만들면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마음’ 뿐이라는 것을 배우고, 작은 이슬방울 속에 거대한 산의 경관이, 거대한 우주의 모습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심안’에도 눈뜨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피를 먹인 ‘신검’을 만들어내게 된다.


고수론_예술의 확장, 이외수식 1만 시간의 법칙


소설가 이외수의 ‘고수론’은 [칼] 이후의 작품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장편[황금비늘]에서는 맹인 지압사 ‘조 선생’의 일화가 압권이다. 뇌졸중으로 오른쪽 수족을 못 쓰던 무명 화가 가 자신의 개인전에 조 선생을 초대했을 때, 그곳에 와있던 권위주의적인 미술계 인사는 맹인을 전시장에 초대한다는 건 미술에 대한 모독이라며 불쾌해한다. 그런 그를 뒤에 두고 조 선생은 마음의 눈으로 무명 화가의 그림을 읽어낸다. ‘슬픈 그림이구나, 시간에 젖어들고 있구나, 못 견디는 그리움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조 선생의 감상평은 관람객들을 모두 숨죽이게 하고, 숙연케 한다. 무명 화가가 온 힘을 다해 그림에 불어넣은 예술혼을 맹인 지압사가 마음의 눈으로 읽어내는 장면은 작가 이외수의 소설관이자 인생관의 집약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소설에서 풀어놓는 이런 이야기들로 인해 일부의 평자들은 이외수를 저속한 신비주의 작가로 치부해버리지만, 그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바로 수많은 단련과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고수의 ‘심안’과 ‘육감’에 다름 아니다. 손대는 일마다 성공하는 사업가의 비밀은 사업을 바라보는 ‘심안’에 있고, 공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축구선수의 비밀 역시 오랜 집중과 훈련이 만들어낸 그 선수만의 ‘육감’인 것.


작가의 ‘고수론’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어느 분야에서건 오랜 집중과 훈련을 거치면 고수가 될 수 있고, 그 고수는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묘한 힘을 갖는다. 장편 [황금비늘]의 주인공 선동은 아버지 번개손으로부터 집중적으로 소매치기 훈련을 받은 뒤로 형사를 만나거나, 현금을 두둑하게 가지고 있는 돈 많은 부인을 보면 절로 전율감을 느끼게 된다. 또 장편 [괴물]에는 자장면 배달의 고수 박경서가 등장한다. ‘하얀 솔개’라는 별칭이 붙은 그는 망해가는 중국집을 단박에 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의 소설들이 독자들에게 위안과 재미를 넘어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고수들의 등장 때문이다. 이외수식 1만 시간의 법칙이 그의 소설 도처에 깔려있다. 오랜 경험을 쌓으면 모든 요령이 절로 터득된다는 그의 고수론이 잠언집 [하악하악]에서 다음과 같이 변주되었을 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그의 소설과 그의 삶의 자세가 지속적으로 중단 없이 최고의 경지를 향한 구도를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일에 평생을 건 사람에게는 오늘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격언이 무의미하다. 그에게는 오늘이나 내일이 따로 없고 다만 ‘언제나’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4.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성인군자들은 오직 그 한 가지 도구만으로

자신과 세상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만들었다.

일체유심조를 깨달았을 때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모든 불행도 사라진다.


일체유심조의 세계_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는가, 봄이 오는가


한때 ‘주요 모순’과 ‘종속 모순’이라는 화두가 사람들을 얽어매었던 시절이 있었다. 어렵게 말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어떤 문제가 풀리면 나머지는 자연 해소된다는 생각이었다. 군사독재가 청산되면 사회의 모든 난제의 실타래가 절로 풀릴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주의. 그로 인해 폭력을 폭력으로 청산하고자 하는 시도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외수의 소설[훈장]과 [괴물] 그리고 [칼]에서 그런 폭력을 폭력으로 청산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주인공은 단 일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거부한다. 그의 세계관은 ‘세상의 모든 불행과 비극은 인과관계가 헝클어진 실뭉치처럼 복잡해서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명확한 판독이 불가능하다.’([청춘불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공부’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는 애당초 남들과는 다른 수리법을 쓰고 있었다.


장편[황금비늘]의 첫 장에서 작가는 마치 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의 첫머리처럼 그의 독특한 비약과 발상의 전환을 가능케 하는 세계관을 피력해놓았다. 어른들은 백이십삼이라 읽는 123을 ‘일이삼’으로 읽는 세계관, 45-4=41이라고 어른들이 말할 때 45-4는 5라고 계산하는 수리법. 이는 근대적 합리성의 세계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됩니다’라고 말할 때, 작가는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옵니다’라는 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천명하는 선언이나 진배없다.


그의 그런 세계관은 어디서 왔을까. [황금비늘]의 격외선당 주인 무간선이 주인공 선동에게 전하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바람이 불어 절의 깃발이 나부끼자 어떤 스님은 깃발이 나부낀다 주장하고 또 어떤 스님은 바람이 나부낀다 주장할 때, 슬며시 육조 혜능이 끼어들어 깃발이 나부끼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나부끼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대들 마음이 나부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 또 작가는 장자의 설검편(設劍篇)에 나오는 세 가지의 칼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신선의 칼’,‘선비의 칼’은 우리 마음 안에 있음을 장편[칼]에 적어놓았다. 모두가 ‘일체유심조’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이외수는 혜능의 제자이자 장자의 제자다. 환부에 직접 칼을 대고 고름을 찢어내는 것이 아니라, 병이 생긴 근원이 마음에 있음을 알고 그것을 어루만지고 수양하게 만드는 쪽을 택한다.


[황금비늘]의 무간선 할아버지가 어린 선동에게 전해준 가르침, ‘언제나 마음 안에 촛불을 환하게 밝혀두고 살아가면 언제나 만물이 아름답게 보이고, 언제나 만물이 아름답게 보이면 언제나 인생이 행복해지는 법이니라.’ 이 짤막한 가르침이 작가 이외수가 타락해가는 세상에 내놓은 처방이다. 주인공 선동이는 그 가르침을 통해 마침내 영혼이 투명한 인간들 앞에만 자주 나타난다는 선계의 물고기 금선어를 보게 된다. 이 가르침은 멀리 장자와, 혜능과 연결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다시 주요 모순과 종속 모순을 떠올려본다. 우리 사회가 어느덧 주요 모순이라 할 수 있는 문제를 간신히 벗어났을 때, 우리는 종속 모순의 소멸을 목도한 것이 아니라 그간 가라앉아 있었던 수많은 문제의 복잡한 분기를 목도하게 되었다. 배금주의로 인한 패륜의 문제, 청년실업으로 인한 희망 상실의 문제, 종교 간의 갈등으로 인한 전쟁, 국제적인 기아와 궁핍의 문제 등은 단 한 번의 칼질로 치유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정신의 칼’과 ‘마음의 칼’이 필요한 세상이 펼쳐졌던 것.


그가 말한 ‘마음의 칼’은 다행히 세상의 여러 사람들이 벼리고 있는 듯하다. 그 어떤 이데올로기나 제도의 개선도 현대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 뾰족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작금, 전 세계가 연대해서 기아와 전쟁을 없애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꿈꾸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의 세계관이 21세기의 현재와 맞닿아 있는 유효한 세계관임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물론 그는 그 같은 세계관을 생경하게 전하고 있지 않다. 그의 소설을 읽어보라. 얼마나 재미난 ‘당의’를 그의 세계관에 덧씌워 전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그는 화두를 통해 깨달음을 일갈하는 선사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재미난 이야기를 통해 조곤조곤 자신이 듣고 경험한 세계를 전하는 소설가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5.


필기도구라고는 연필밖에 모르는 철수에게

영희가 볼펜을 선물했다.

철수는 깎아 쓰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볼펜을 쓰레기통에 내던져버렸다.


근대적 합리성을 넘어서는 글쓰기의 공중부양


이외수는 늘 그래왔다. 그는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노래했다. 예술은 사회와 체제를 변화시키고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주의를 앞당기는데 헌신해야 한다고 여겨지던 시절, 예술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야 하고 예술은 수많은 장삼이사들에게 구원이어야 한다고 노래했다. 또 세상이 바뀌려면 썩어 문드러진 위정자를 갈아치우고, 잘못된 제도를 혁신해야 하고, 평등과 분배의 정의를 확립해야 한다고 누구나 목소리를 높이던 시절, 세상이 바뀌려면 제 눈의 들보를 반성해야 하고 모두가 마음공부에 매진해 스스로의 이기심을 극복해야 한다고 노래했다. 모두가 4+5는 9라고 말하던 시절에 왜 4+5는 45가 되면 안 되냐고 노래했고, 모두가 저렇게 나쁜 놈은 돌로 쳐 죽여야 한다고 말할 때 저 혼자 방구석에 앉아 천 개의 불상을 만들어서 죽어간 영혼과 삐뚤어진 영혼을 함께 위로하고자 했다. 모두가 개발과 성장을 외칠 때, 그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노래했고 누구나 출세를 위해 국영수를 외칠 때, 그는 자신만의 보석을 찾아 한 길로 매진하라 일갈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표현대로 ‘조낸 버티기’에 들어갔다. 아무도 그의 버티기에 대해 평하지 않았다. 무관심. 오직 그의 소설에 위로받는 독자들만 그를 따랐고, 소설가 이외수는 기다렸다. 그동안 꽤 여러 번 소위 ‘문학의 죽음’이 도래했다. 허나 이외수는 소설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리고 마침내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인간은 합리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예측 가능한 비합리적인 동물이라고 말하고 있고(행동경제학), 세계적인 기업의 CEO들은 선불교와 동양적인 참선, 즉 마음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또 사람들은 이제 4+5=9가 되는 기계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는 창의적인 역발상을 요구하고 있고, 변호사나 의사, 장관, 대통령을 선호하기보다는 어떤 분야에서건 각고의 노력을 통해 고수가 된 사람들을 추앙한다. 축구선수 박지성과 발레리나 강수진의 울퉁불퉁한 발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생각하고, 제빵왕이 된 김탁구에게 열광한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 빠른 할리우드는 장자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매트릭스’와 최근의 ‘인셉션’ 같은 전 세계적인 콘텐츠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저항 없이 향유하고 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고,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궁리하고 있다.


소설가 이외수의 ‘조낸 버티기’는 아마 그래서 40만 독자에게 사랑받는 것일 것이다. 그가 단순히 누구보다 먼저 트위터에 눈을 떴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그가 누구보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서도 아니다. 이외수는 늘 거기에 있었고,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과 삶의 자세로 늘 독자들을 만났다. 그의 열성 독자들도 그런 그에게 위로받고 자극받고 깨달으며 지금껏 교유해 온 것이다. 다만 소설가 이외수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펼쳐졌음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꽃노털 옵하’의, 시대를 따라잡는 놀라운 순발력과 의외의 분전으로 보일 뿐.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 그의 다음과 같은 잠언이 떠오른다. 


‘고수는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하지만, 하수는 천만 가지 생각 속에 길을 잃는다.’ 


소설가 이외수, 그는 일평생을 마음의 칼을 벼리며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해온 우리 시대의 고수다. 다섯 살 어린아이가 “할아버지, 공중부양해봐요.” 하면 식은땀을 흘리며 씨익 웃는 그런 천진하고 친근한 고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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