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 책 많이 읽으세요~
저는 2002년 경에 처음으로 출판일을 시작했습니다. 한일 월드컵이 개최되고 우리나라 대표팀이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달성한 해라 잊지 못하지요. 그 당시 <<교양-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책이 상당히 화제가 되었습니다. 7~800페이지 두께의 ‘벽돌책’이었는데 상당히 많이 판매되었거든요. 저는 그 책을 보며 좋은 인문서가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구나, 싶어 꽤 주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인문서를 기획해서 만들고 싶었었지요. 벌써 20년이 훌쩍 넘어버린 옛이야기가 됐네요.
사실 저는 ‘교양’이라는 책이 출현했을 때부터 이미 ‘교양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원래 베스트셀러는 그 시대의 ‘부재 증명’인 경우가 왕왕 있잖아요? 영화 <<친구>>가 엄청나게 흥행했던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친구를 찾기 힘들어진 방증인 것과 비슷하지요. <<교양>>도 그와 비슷하게 그 시대에 더 이상 <<교양>>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시절에는 그나마 ‘교양’이라는 것이 유의미하게 존재했던 것 같네요.
제 기억으로는 우리 사회에 ‘교양’의 죽음을 가져온 상징적인 사건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학문적으로 전혀 검증되지 않은 것이니 재미로 봐주세요.) 그 하나는 naver의 ‘지식인’ 서비스의 출현입니다. 한국판 위키피디아라고도 불렸던 것 같은데요. 이 ‘지식인’으로 인해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것에 대한 ‘격하’가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한 지식인은 ‘네이버 지식인’이라는 농담이 회자되곤 했었지요. 제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결국 지식인에 물어보고 아는 것에 못 미치니, 뭐 하러 책을 열심히 읽고 교양을 쌓냐는 것이었지요. 예전 같으면 ‘교양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았을 사람들이 고리타분하고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놀림을 받았지요.
그리고 두 번째 상징적인 사건은 아이폰의 한국 상륙입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의 손에 ‘제2의 뇌’에 해당하는 스마트폰이 하나씩 들리게 되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비서를 24시간, 365일 내내 우리 옆에 둘 수 있게 된 겁니다. 그 이후로 우리 사회에서 교양에 대한 니즈는 표면적으로는 사라졌던 것 같습니다. 아이폰이 갓 수입되고 스티브잡스의 ‘인문학적 지식’이 조명되면서 실용적인 차원에서 인문학 공부에 대한 니즈가 잠시 높아졌던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갖춰야 할 ‘보편’ 지식에 해당하는 교양에 대한 강조는 거의 사라졌지요. 그깟 지식은 언제든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획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사회에 지배적으로 퍼진 까닭일 겁니다. 이후로 ‘전문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의 시대’, ‘돈 버는 지식의 시대’가 도래했지요.
2020년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자신이 겪은 경험이 중요할 뿐,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춰야 할 지식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 고흐가 누구인지 아는 것보다 ‘얼죽아’, ‘얼죽신’ 같은 새롭게 만들어진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것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지는 것 같더군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과 정보가 서로 동급이 되는 세상이 되고 보니 ‘교양’이라는 말은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박태웅 한빛 미디어 의장의 강연을 듣다가 다시 ‘교양’이 주목받는 시절이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박태웅 씨의 설명에 따르면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특정한 일을 수행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너무 잘하기 때문에 그런 종류의 일은 더 이상 인간의 일로 오래도록 남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런 일은 결국 인공지능에게 모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인간은 인공지능에게 지시하는 일을 수행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인공지능을 잘 다루려면 지시를 잘해야 하고 지시를 잘하려면 ‘질문’을 잘해야 합니다. 그럼 ‘질문’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뛰어난 인터뷰어들은 인터뷰이에 대해 정말 샅샅이 조사합니다. 저는 문명특급의 재재, 천재 이승국의 이승국, 최성운의 사고 실험의 최성운 등의 인터뷰어들을 좋아하고 종종 그들의 인터뷰를 시청하는데요, 이 세분의 특징이 사전 조사를 엄청 꼼꼼하게 다방면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질문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잘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자세한 지식, 즉 풍부한 교양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실 ‘교양’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교양이 사실 상당히 서구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는 분들도 많고요, 다분히 계급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다 타당하고 의미 있는 비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제 우리 사회는 어쩌면 다시 ‘교양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만이 AI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디지털의 시대라도, 아무리 인공지능의 시대가 왔어도,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저는 25년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 ‘독서의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얻은 풍부한 교양을 통해 인공지능을 잘 부리게 되어 우리 앞에 닥친 험난한 시절을 잘 타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해 인사는 이렇게 해 볼까요?
"새해 책 많이 읽고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