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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좋아하세요?"

- 문득, 취향을 물어보세요.

by 강호



“영화 좋아하세요?”


회사 에스컬레이터에서 점심시간에 마주친 동료가 물었습니다.


“네!”


제 대답에


“왓챠피디아 하세요?”


라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하지 않는다, 근데 그거 하면 뭐가 좋은가? 제가 되묻자,


“아뇨, 그냥 친구 맺기 하면 어떤 영화 좋아하시는지 알 수 있어서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동료는 그냥 물어본 것일 테지요. 저보다 20년가량 나이 차이가 나니 제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궁금할 리가 없지 않겠어요? 에스컬레이터에서 멋쩍은 분위기를 없애기 위한 아주 가벼운 스몰 토크였을 겁니다.


그런데요. 기분이 묘하게 좋았습니다. 신선했거든요.


누군가가 나의 직장이나 연봉, 직위 같은 사회적 지위나 내가 사는 지역, 아파트 평수, 자가인지 전세인지, 은행 잔고 액수, 차종과 연식 등의 금전적 지위, 그리고 자녀의 등수, 대학 입시 결과 같은 교육 문제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나의 ‘취향’을 물어보는 질문을 정말 정말 오랜만에 받아봤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니면 정치 이야기뿐이었으니까요.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친구들을 만나면 대부분 레퍼토리가 비슷해졌습니다. 조금 젊었을 때는 누가 어느 회사를 갔다더라는 취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고요. 조금 나이가 더 드니까 친구들 중 대기업에 입사한 몇몇 친구들의 무용담이 술자리에 왕왕 안주감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기를 잠깐, 결혼과 출산을 거친 비슷비슷한 또래의 지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아이들 교육 이야기를 과장 조금씩 보태 떠들어대기 일쑤였습니다. 이제는 동년배들을 만나면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화두입니다. 온갖 매체에서 주워들은(?) 각종 건강 상식들이 체험 정보가 가미되어 여기저기 권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언제부터인가, 모임이나 회식을 그리 즐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맛의 음식을 앞에 두고 내가 그다지 즐기지 않게 된 알코올 음료와 함께 하나도 새롭지 않은 재재재방송 같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은 일 년에 한두 번이면 충분한 것 같았거든요.


모두가 ‘너의 비교 우위에 대해 이야기해 봐. 내세울만한 게 없어? 그럼 내 이야기를 들어봐. 나는 말이야, 이렇게 지위가 높아. 대단하지? 나는 말이야, 이렇게 돈이 많아. 대단하지? 나는 말이야, 이렇게 애들이 공부를 잘해. 대단하지? 나는 말이야, 이렇게 자기 관리를 잘했어. 대단하지?’라고 말하는데, 그 틈바구니로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가 끼어들었던 것입니다.


“영화 좋아하세요?”


그 말 한마디가 제게 삶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오래 오래간만에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아, 취향에 대한 질문이라니요.


젊은 시절에는 종종 서로 물었거든요.


“어떤 음악 들어?”, “도어스, 들어봤니?”,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 레터 같이 보지 않을래?”


지금도 간혹 물어보고 싶거든요.


“험프 백의 ‘친애하는 소년이여’ 들어봤어?” 라거나 “라 트라비아타를 쓴 작가가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작가의 아들이래. 읽어봤어?”라는 식의 이야기.


나이 들어 주책맞게 왜 이러냐 싶겠지만, 음악과 영화, 소설과 시, 여행과 명상, 감사와 존경, 사랑과 존중, 이런 것들이 삶을 칼라풀하게 만들어주는 색채들이잖아요. 아, 그래, 나 영화 좋아했지. 나도 음악 취향이란 게 있었구나. 이렇게 깨닫게 해주는 질문 아닐까요. 좀 겉멋 든 것 같아도 괜찮아요. 꽤 많은 예술가들의 출발은 겉멋이었을 거예요.


앞으로 저도 왕왕 이렇게 물어봐야겠습니다.


“영화,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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