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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나?

- 인공지능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

by 강호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면서 종종 '인간의 영역'이라는 것이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얼핏 인공지능의 '요약하기'에 대응되는 인간의 '행간 읽기'가 생각났습니다.


챗GPT 등의 LLM이 가진 장점으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요약’입니다. 수십 페이지로 된 논문도 1-2초 만에 한 장으로 요약해 줍니다. 꽤 오랜 시간 들어야 하는 유튜브 영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링크만 넣으면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요약됩니다. 정말 편합니다. 특히 꽤 긴 영어 기사나 영어로 된 논문을 요약하여 한국어로 제시해 주는 기능은 정말 놀라운 기능 중 하나입니다.


간혹 어려운 내용이 보이면 저는 ‘초등학생도 알기 쉽게’ 설명을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챗GPT는 비유까지 사용해서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 어떤 과외 선생님보다 알기 쉽게 알려줍니다. 지치지도 않습니다. 다시 물어보고 또다시 물어봐도 짜증 내지 않습니다. 어릴 적 형에게서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한 10분 배웠을까요. 포기했습니다. 그 10분 동안 인내심의 한계치를 확인하게 되더군요. 온갖 무시와 비아냥, 인신공격이 난무했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설명을 들어야 하나 싶어 그 이후로는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생겨도 형에게 물은 적은 없었습니다. 근데 챗gpt는 전혀 다르더군요. 이제 과외 선생님이 없어서 공부 못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물론 인공지능이 보편화되기 이전에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봐도 됩니다. 그러다 인터넷이 발달하자 인터넷에 무료강의가 많아졌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 배울 일은 없었습니다. 단지 혼자서 배울 때 ‘막히는 대목’이 나오면 그걸 뚫고 나가기 어려워 포기하게 됐었죠. 근데 인공지능은 그 ‘막히는 대목’도 뚫어줍니다. 이제 배움은 오롯이 ‘의지’의 문제가 됐습니다.


하지만 저는 인공지능이 해준 요약글을 읽을 때는 조심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그 무엇을 놓치게 되는 것 같거든요. 바로 ‘인사이트’입니다. ‘통찰’이라고도 하죠. 분명 ‘간명하게 요약된 글’을 읽는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은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콘텐츠가 흘러넘치고요. 이런 세상에서 인공지능의 요약 기능은 엄청 요긴합니다.


문제는 요약된 글’만’ 읽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나를 정신적으로 살찌우는 독서 경험은 요약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책을 펴놓고 밑줄치고 여백에 내 생각을 끄적거릴 때, 그럴 때 통찰이 얻어졌던 것 같습니다. 한참 읽어가다가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와 다시 곱씹어볼 때 좋은 생각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그런 멈춤과 되돌리기, 책과의 상호 작용 등의 과정 어딘가에서 ‘통찰’이라는 것, 아이디어라는 것이 싹트는 것이잖아요?


논문이든 책이든 행과 행,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절과 절, 장과 장 사이에 글쓴이의 오랜 숙고가 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게 나의 멈춤, 나의 사고, 나의 경험과 화학적인 작용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러면 뭔가 충격처럼,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아하! 하는 모멘트가 오곤 하지요. 그 놀라운 순간은 요약된 글에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난리법석일 때,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무엇이 중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가 인공지능과 대화해야 하는 시점인지를 인지해야 합니다. 반면 언제 펜과 노트를 들고 사색에 잠겨야 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이게 없으면 삶은 한없이 헐거워집니다. 영양분이 하나도 없는 음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겁니다.


혹자는 그런 인사이트나 통찰도 인공지능이 조만간 도출해 낼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합니다. 범용인공지능이 우리 인간의 모든 사고를 대체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죠. 당장 2030년에 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인간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 생기겠지요. 아니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범용인공지능은 현재의 LLM으로는 도달하기 어렵다고 예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수많은 예측이 범람하는 시대입니다. 엄청난 수의 ‘선지자’(?)들이 미래를 전망합니다. 그들이 다 맞지 않을 겁니다. 삶은 그리 간단히 예측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거짓 선지자들의 암울한 예측을 듣고 있으면 미래를 헤쳐갈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의 많은 기능 중에서 내 일과 내 꿈에 적합한 것을 가려내어 나의 시간을 아끼고 나의 노력을 증폭시키는 데 써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한편으로는 매우 급격하게 바뀝니다. 반면 다른 측면에서는 아주 서서히 변합니다. 이렇게 안 변한다고? 싶을 만큼 안 변합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볍게 변화하는 표층을 인공지능에게 맡기고 깊은 심해의 더디게 변하는 영역은 우리 역량을 더욱 벼리는 방향으로 중심을 잡는 일일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더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인공지능과 경쟁하면 백전필패입니다. 거기서는 인공지능을 나의 협력자로 만들어 증폭시켜야 할 것 같고요. 반면 인공지능에게 맡길 수 없는 마지막 ‘터치’의 부분에서는 전문성을 더욱 높이고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직관과 통찰의 영역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아주 잠정적일 수 있는 대처이지만, 지금은 이 방법 말고는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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