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사막에도 비를 내리게 하는 힘이 있다
“五味川純平을 아시다니요” / 정건우
점심 식사 후 대형 송풍기의 성능 검사에 입회하였다. M사의 제조 시설은 우리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보통의 일본 공장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청결함이나 현장의 정리정돈 상태도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조립 대기 중인 기계 부품과 조립 공정 또한 내 눈엔 그저 평범하게만 보였다. 이 회사의 그 무엇이 송풍기 효율 88%라는 놀라운 성능을 발휘케 한 것일까?. 모터는 오전부터 가동하여 베어링 온도는 포화상태였다. 발주사 한국의 사업부 차장이 직접 검사에 참여해서 그런지 직원들은 다소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였고, 내 질문을 그대로 복창하며 상세하게 응대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좋았다. 풍량, 압력, 전압과 전류, 소음 진동 등 검사 제반 조건을 충분히 만족하였다. 담당 QC 과장 무사시가 브리핑을 하겠다며 나를 회의실로 안내하였다.
96년, 당시 PM 차장이던 나는 매우 중요한 검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거래처인 포스코의 전력 절감장치 데모 설비였다. 포스코에서 가동하고 있는 설비 중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잡아먹는 장치가 송풍기라 했다. 그 금액 또한 천문학적인 규모였다. 회사는 포스코 건설 당시부터 지금까지 포항, 광양 제철소에 약 2,000기가 넘는 대형 집진장치를 공급하고 유지 보수해 왔다. 환경설비 중에서도 송풍기는 성능을 좌지우지하는 매우 중요한 장치다. 송풍기의 효율을 높이면 전기료는 실감할 정도로 낮아진다. 그 효율은 성능 곡선 그래프를 통해 도출되는 데 보통 50~60% 정도다. 그런데 M사는 88%까지 끌어낸다는 것이다. 창업주인 M사 회장은 우리 회사를 방문하여 50년 외길 뚝심이 이룩한 성과라며 고효율 송풍기를 겸손하게 설명했었다.
회의실은 다소 어수선한 2층 사무실의 끝부분에 있었다. 무사시의 책상 위치를 묻자 모퉁이 구석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온도계, 진동계, 마이크로미터 등 계측기가 책상 한쪽에 수북하였다. “이런 계측기 따위를 왜 책상 위에 쌓아 놓지?”라는 생각으로 힐끔거리다가 들쑥날쑥한 책꽂이에 꽂힌 「人間の 條件」이란 책에 시선이 박혔다. 즐비한 기술서적 사이에 빼꼼한 소설책이라니. 다소 뜬금없었지만 순간 호기심이 뒷덜미를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대하소설「인간의 조건」을 재밌게 본 것이 몇 년 전인데도 여운이 아직 선연한데 일본 원서를 보니 반가웠다. 무사시가 달달한 커피를 한 잔 타왔다. 그러고는 출력한 성능곡선도 그래프를 OHP 화면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 사극에서 보고 듣던 사무라이 같은 목소리였다. 말끝마다 절로 웃음이 났다.
무사시 과장은 이번 발주품 검사와 관련, 사전에 이메일과 전화로 몇 번 소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연배라는데 적당한 키에 풍채가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 바닥에 깔리는 저음의 목소리는 온통 머리를 흔들 정도로 공명감이 있어 깊고 특이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거기 까지였다. 겪어보니 무사시는 매우 건조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말이 없고 붙임성이 없어 대인 관계는 소질도 관심도 없는 연구원 타입이었다. 도무지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외에 먼저 말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제품의 성능검사 결과가 훌륭하다고 칭찬하여도 그냥 고개 한 번 끄덕이는 것이 반응의 전부였다. 우리 회사에서 이 사람에 필적할 만큼 건조한 직원을 떠올려 비교해 봤지만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무사시는 아타카마 사막이었다.
내일 시행할 잔여품 검사 일정을 설명 듣고 이럭저럭 재미없는 잡담을 나누던 때였다. 나는 일부러 화제를 바꿔보았다. “「인간의 조건」을 쓴 저자 고미가와 준페이와 「사양」의 다자이 오사무란 작가를 문학 성취도로 비교해 본다면 어떻게 되나?”라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하마 같은 그의 얼굴이 급반색하더니 “감독님, 고미가와 준페이를 아시다니요”라며 엄청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책을 몇 년 전에 감동 깊게 봤고, 저자의 문학적 위상이 궁금하던 차에 혹시 하는 심정으로 물어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무사시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활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과자 등 기타 먹거리를 준비할 테니 괜찮겠냐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화과자와 달달한 음료를 잔뜩 가지고 잠시 후 그가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나는 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인간의 조건」은 일제 치하, 만주에서 부당과 부조리와 싸워가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한 인간을 다룬 대하소설로, 1955년에 출판된 책이다. 1,500만 부 이상 팔린 그 책을 무사시는 두 번째 정독 중이라고 말하였다. 일본군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어떠한 미화 없이 처절하게 벌어지는 인간성 파괴와 가혹행위 속에서 휴머니즘이 발현되는 반전 내용이 엄청난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에 적당한 반응으로 공감을 표하고 중간중간 끼어들며 양념을 치자 무사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알고 보니 그는 달변가였다. 또한 일본의 전후 문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어 보였다. 특히 오오카 쇼헤이, 다자이 오사무, 미시마 유키오에 달통한 듯했다. 급변한 사회 분위기, 허무감을 대변하던 당시 문학 풍토와 현재 무사시의 정서적 상관관계가 궁금하였다.
내가 발주사의 감독관임을 까마득하게 잊은 채, 일본 문학에 관심과 지식이 있는 문학도로 무사시는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한 시간 넘게 그의 굵직한 입담에 추임새를 넣고 열띤 공감을 보내자 그가 신이 난 듯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별도로 특별히 관심 있는 일본 작가가 있냐?”라는 질문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20년대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사조를 일본에서 신감각주의로 펼친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라고 하자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메모를 하는 것이었다.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가까운 야끼니꾸 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며 나눈 대화는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 이야기로 확대되었다. 지금껏 만난 일본 중년 중에 우에스기 겐신을 알고, 일본 근대 역사에 반성적인 사람은 무사시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거의 허물없는 친구가 되었다.
어제와는 달라진 분위기로 잔여품 검사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다시 무사시와 마주하였다. 검사 서류에 합격 도장을 찍고, 출장 목적이나 다름없는 효율 사항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철저한 품질관리와 송풍기 효율의 극대화는 비례관계가 아닌데, 88%까지 효율을 끌어올린 결정적 요인이 무엇이냐는 다분히 의도된 질문이었다. 무사시는 잠시 머뭇하더니 임펠러와 조립 구성품의 주요 각도, 형상의 특별함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50년 동안 연구에 매달린 회장의 노하우라는 것이다. 다만 구체적으로 수치화할 수는 없어 실험을 통해 도출해야 한다는데 나는 동의하였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무사시 덕에 고효율의 핵심을 한 발짝 더 가까이서 들여다본 것이 나는 흡족하였다. 다음에 만날 때, 요코미쓰 리이치 이야기를 하기로 하였다. 문학은 사막에도 비를 내리게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