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이제 아버지를 한참이나 초월하신 도인이네.
기저귀와 물티슈 등 병실 용품을 사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병원 복도에 서 계셨다. 참으로 오랜만에 병실 밖으로 나오신 것이다. 간호사가 적당한 거리에서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창밖 너머 야산의 계곡을 보고 계신 것 같았다. 비스듬한 옆모습에서 어떤 단호한 것이 스쳐 지나는 순간 아버지가 치매 노인이라는 느낌이 사라졌다. 몇 분이나 그러고 계셨을까?. 때로는 웃으시는 듯하고, 어떨 땐 우시는 듯한 입술 모양과 그득한 눈물은 내게 매우 생경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간호사 옆에서 아버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아버지"하고 불러봤을 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치매 노인이 되어 아버지는 다시 병실로 들어가셨다. 이런 아버지의 돌연한 모습은 간호사도 처음 본다고 하였다. 피곤하게 잠드신 모습에서 나는 아버지의 여명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예감하였다. 복도로 나온 나는 당신이 서 계시던 각도대로 서서 창밖 야산의 계곡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고관절 수술을 하신 아버지를 수발하려 병실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 새벽녘이었다. 주무시던 아버지가 잠꼬대를 하시는데, 너무도 또렷한 발음으로 당신의 사촌 동생들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시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음성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삼 년 전이다. 나는 눈물을 왈칵 쏟았다. 비가 올 것 같으니 장비를 챙겨 내려가라고 아버지는 동생들을 닦달하고 계셨다. 토끼몰이를 하고 계신 듯했다.
"빨리 가. 비 온다"
그리고 한참 뒤 적막이 흐르고 나서
"건우야"하고 내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또 오열하였다.
아버지 사촌 형제들은 세상에 안 계신 분들이다. 아버지는 칠십 년 전을 잠깐 소환하시고는, 마침 오는 비를 뚫고 억겁의 억겁을 지나 삼 만년쯤 사시다가 눈 깜빡할 사이에 다시 오셔서 나를 낳으신 것이다. 삼 만년 전의 구름이, 바람이, 나무 이파리가 저 계곡에 가득한 것이 아버지가 서 계시던 각도에서 뚜렷이 보인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부르는 소리가 맑게도 들린다. 아버지가 거느리셨던 영혼의 그늘 속이다. 즐거웠던 곳으로 잠깐 마실 가시겠다는 당신의 뜻이다.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가 몹시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