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영 Oct 19. 2020

삼일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계영으로 살아갑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살지만 가끔 계와 영으로 분리될 때가 있습니다. 레오 리오니의 그림책 파랑이와 노랑이가 초록이 되었다가 다시 파랑이와 노랑이가 되는 것처럼요. 최근 삼일 동안 계와 영이 자주 분리되어 혼란스러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요.


추석 지나고 계영은 언니들을 만났습니다. 세 자매는 자로 잰 듯 각각 일곱 살 터울로 계영과 큰언니 나미는 14살 차이 납니다. 여느 나이 든 사람들처럼 언니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아 제법 많은 시간을 몸 관리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듯합니다. 고혈압인 나미는 언제나 다이어트를 해도 모습은 변함이 없고, 둘째 언니 이숙은 퇴직하고 간헐적 다이어트라는 걸 맘먹고 하더니 볼 때마다 조금씩 살이 빠져 있습니다. 만난 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이숙은 이번에 또 살이 빠졌더라고요. 고지혈증이 있어 살이 찌면 큰일 난다고 하네요.


그동안 나미와 이숙의 살빼기 무용담은 계영에게 먼 나라 이야기였지만 그날은 좀 다르게 들렸습니다. 40년 조금 모자란 기간 동안 매달 걸렸던 마법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거든요. 덩달아 시달렸던 빈혈에서 해방되었는지 어떤 면에서는 기운도 예전보다 조금 더 나는 것 같고 두통도 덜 찾아오는 듯합니다. 문제는 옷이 작아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늘어지고 낡아 못 입는 옷은 있어도 작아서 못 입은 옷은 그동안 없었는데 말이죠. 가을이면 늘 교복같이 입던 바바리를 걸쳐 봤더니 들어가긴 하는데 어깨와 등이 여간 불편하지 않습니다. 꼭, 쑥쑥 크는 아이들이 작년 옷 입고 나왔을 때의 어정쩡한 모습 같다고나 할까요. 키 작은 계영이 키라도 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집으로 돌아오며 계영은 이숙이 했던 말이 자꾸 신경 쓰입니다. 너도 별 수 있겠어. 나이가 있으니 몸 그대로 방치하면 고지혈증 같은 게 당장 오지. 신경 써! 고지혈증? 방치? 그렇구나, 그냥 세월대로 살면 방치구나... 사실 그것보다 어쩌면 계영은 얼마 전에 발견한 사진이 더 신경 쓰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컴을 정리하다 마당 꽃밭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몇 년 전 사진을 발견한 순간, 어머! 젊었다, 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거든요. 두리뭉실해진 허리에 초보 헤어디자이너가 고른답시고 자꾸 자르다 삐죽삐죽 숏 커트가 되어버린 헤어스타일까지, 요즘 모습과 얼마나 괴리감이 들었으면 계영은 자기 사진을 보고 놀라기까지 했을까요. 거기다 영화 <카모메 식당>은 왜 또 봐버렸는지. 예전에 봤을 땐 식당 주인 사치에의 작고 담백한 몸을 보며 계영은 자신도 저 정도까지 마른 적 있고 지금도 이 정도면 괜찮지 뭐, 하는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며 영화에 빠졌더랬지요. 근데 최근 다시 보니 이제 사치에는 돌아가지 못할 세월의 모습을 두르고 있었습니다. 풋풋한 젊음은 아니지만, 인디언 서머 같은, 어쩌다 보내버린 40대의 젊은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살랑거렸어요. 비단 살의 문제가 아님을 알지만 이래저래 심란해진 계영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 나도 이제 다이어트라는 걸 해봐야겠어. 세월에 장사 있나. 이숙 언니처럼 간헐적 다이어트를 하는 게 제일 낫겠다. 한 끼만 굶어도 저렇게 쑥쑥 빠지는데. 내가 식욕이 늘어 살이 찐 게 아닌 걸 보면 이젠 삼시 세끼가 내 신체활동에 비해 과하다는 뜻이야. 난 배고프면 잠을 못 자니 저녁을 7시 전후로 먹고 다음날 12시까지, 그러면 딱 16시간 금식이 되니 적당하겠군. 며칠 하다 보면 몸도 적응하겠지... 영, 너도 동감이지?

글쎄, 그게 생각만큼 쉬울까. 평상시 식습관을 생각해봐. 위산이 많고 위염이 있어 조금씩 자주 먹는 편이잖아. 16시간이라는 긴 공복을 견딜 수 있을까. 저녁을 조금만 일찍 먹어도 자기 전 허기져 비스킷 한 조각이라도 먹고 자면서...

그래, 그 식습관 때문에 어쩌면 위염이 자주 발생하는지도 몰라. 이참에 병도 고치고 다이어트도 하고. 우리 몸은 습관들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해. 내 몸도 변화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 한번 해볼게.


첫째 날

계영은 그토록 챙겨 먹던 아침을 안 먹으니 조금 허전했지만 생각보다 배가 고프지 않아 견딜만했습니다. 공복일 때 운동을 하면 지방을 더 태운다는 말에 이참에 오전엔 산에 꼭 가기로 했고요. 혹시나 가끔씩 오는 저혈당 증상이 올까 봐 초코바를 호주머니에 넣고는 산에 올랐는데 오히려 발걸음이 가볍고 정말 지방을 태우느라 몸이 열일 하는지 평소보다 땀이 더 났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오기 까지는, 다이어트가 생각보다 쉽네, 라는 생각에 마음도 가벼웠지요. 점심을 먹으려 챙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갑자기 손이 떨리고 어슬어슬 추워지기 시작하더군요. 밥이 차려진 순간 폭풍 흡입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애써 억누르며 되도록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려 또 애쓰며 소중한 점심 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러고는 꼼짝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콘센트에 전기 코드가 막 꼽힌 전기제품처럼 계영의 몸은 오래간만에 들어온 음식을 소화시키느라 열이 나면서 노곤 노곤해지기 시작했어요. 식탁에서 겨우 일어나 비틀거리며 소파 쪽으로 갔는데 앉자마자 기면증 환자처럼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오후 내내  정신이 몽롱한 상태가 이어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놀래긴 놀랬나 보다.  일상이 흐트러지네... 조금씩 나아지겠지. 겨우 하루 지났는데 뭘.

왜 이렇게 춥고 기분이 이상하지...  뭐가 안정이 안돼. 먹은 게 소화도 잘 안되고. 정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까???


둘째 날

예민한 계영은 의외로 지난 밤 잠은 잘 잤습니다. 평소보다 가볍게 잠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기도 하고요. 밥보다 빵과 커피가 생각났지만 아침부터 집안일도 하고 스트레칭도 하고, 자꾸 몸을 움직여야 될 것 같습니다. 산에 가기도 너무 이른 시간이라 어설렁거리다 컴이 있는 책상이 힐끔 쳐다봐졌지만 왠지 오전에 앉기가 두려웠어요. 분명 아침을 먹을 때도 오전에 뭔가 했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아침을 안 먹은 오늘만 살아있는 듯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느껴져 계영은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마치 하루가 점심 먹기 전과 후로 나누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역시 점심을 먹고 나니 어제와 같은 증상이 똑같이 일어나 오후가 날아가 버렸고 겨우 저녁 무렵이 되어야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겨우 아침으로 먹던 빵 한 조각이나 퉁퉁 불은 누룽지 한 공기 안 먹었을 뿐인데 하루가 이렇게 영향을 받다니...

도대체 이 몸은 어떻게 생겨먹은 거야.

아침 한 끼 문제가 아니지. 그동안 식습관으로 보면 무려 16시간을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게 기함할 일이잖아. 그나마 부지런히 챙겨 먹은 세끼 힘으로 그럭저럭 끼니 사이를 살았는데 한 끼가 뻥 뚫리면 얼마나 타격이 크겠어. 산에서 저혈당 안 오고 두통 안 오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해. 얼마나 기운이 없으면 겨우 밥 반공기 소화시킨다고 온 몸이 기진맥진되겠냐. 그래도 넌 겨우겨우 움직이지만 난 이틀 동안 아무 일도 못했어. 책도 읽어야 되고 글도 써야 되는데 엄두가 안나. 생각하는 게 힘들어. 그만하자 제발. 이 방법은 아닌 것 같아.


셋째 날

계영은 오전에 많이 움직여 오후가 그렇게 힘든가 싶어 오늘은 산에 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아침부터 각성상태처럼 정신은 또롱또롱했지만 어디에도 집중할 수 없어 누워서 스트레칭이라도 해봅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한 유연함이 오히려 어색하고 뜬금없이 흰머리나 털은 배고플 때 뽑으라는 어른들 말이 떠올랐어요. 가벼운 몸으로 가방을 들고 금요일마다 열리는 알뜰시장을 어슬렁거려 보지만 사고 싶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단골인 돈가스집을 지날 땐 기름 냄새가, 생선가게 앞에선 비린내가, 홍어집에선 쿰쿰하고 쉰내가 비위를 건드려 빈 가방으로 돌아오고 말았지요. 하릴없이 폰을 열어보지만 카톡방도 브런치도 다른 세계 같아 영혼 없는 댓글이 생각났지만 그것도 한심해 무리에 끼지 못하는 외돌톨이처럼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돼. 딱 일주일만 해보자. 주말에 식구들 있으면 좀 나을지도 몰라. 일단 주말 보내고 또 생각해보자.

아니야, 식구들 있으면 밥 챙겨야 되니 더 힘들어질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나 우울해 못 견디겠어.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할 수 있는 게 없어.  나를 느끼던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할 수 없는 게 너무 두렵고 힘들어. 시간 지나면 적응될 수도 있겠지만 희망이 안 보이고, 지금 현재 아무것도 힐 수 없는데 나중에가 뭐가 중요해. 도대체 비만으로 중병이 걸린 것도 아니고 전보다 조금 쪘을 뿐인데 웬 호들갑이야. 슬림으로 샀던 옷들이 안 맞지 맞는 옷들이 더 많잖아. 그리고 또 무엇보다 이젠 50대에 적응해야지. 웬 젊음 타령이야. 아무리 살 빼고 의료기술로 치장해본들 나이는 속일 수 없어. 중요한 건 마음이 늙어 의욕, 호기심, 타인, 공감능력... 이 떨어지는 거야. 그러면 기쁨도 즐거움도 슬픔도 감동도 없지. 정말 무섭지 않아. 지나간 젊음 붙잡으려 허공에 헛손짓하지 말고 남은 인생에서는 지금이 제일 젊다는 걸 기억해.


자기 전에 계영은 속이 쓰려 우유를 한 잔 따뜻하게 데워먹고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밥을 냄비에 천천히 까닥까닥 누리다 취이이익~~~ 시끄러워질 걸 예상하며 물을 붓고는 또 천천히 불려 구수한 누룽지를 만들고 계란 프라이를 정성스레 하고 알맞게 익은 김치랑 먹으며 앞에 앉은 사람에게 조곤조곤 얘기를 늘어놓았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난 듯 몸과 마음에 온기가 가득 차 올랐어요. 기분 좋은 나리함으로 스러져있다 벌떡 일어나 커피를 내려 한 잔 들고는, 물론 입에 달콤한 걸 하나 물고는 컴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이야기가 떠올랐거든요. 뚜껑을 열자 찌릉찌릉 소리와 함께 자판 틈으로 반짝이는 가느다란 은빛이 새어 나왔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