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인간이나 동물이 원래 조용한 생명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큰 소리를 지르거나 야단스럽게 우는 사람을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듯이 인간은 은밀하게 살아감으로써 자신을 지켜왔다고, 저는 믿습니다. 시시한 일상의 사소한 일로 보이는 것도 자세하고 깊이 관찰하다 보면, 거기서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 다니구치 지로의 <산책> 중 ~
패셔니스타들만 취향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런 평범한 옷차림의 도를 넘어 겨울이면 따듯하다는 이유로 아들이 중학교 때 입던 빨간 패딩을 입고 온 동네를 뽈뽈거리며 다니는 녕에게도 취향이 있었다. 있었다,라고 한 이유는 본인도 몰랐는데 함께한 세월이 가르쳐 주어, 예전에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녕이 스스로 옷을 고르기 시작한 건 국민학교 시절부터다. 엄마가 사준 바지가 마음에 안 들어 다음 장날 가서 바꿔온 기억이 선명하다. 바지 양쪽 호주머니 윗부분이 살짝 삼각형으로 뒤집어지며 빨간색이 나오는 살구색 바지였다. 국민학생 녕이는 분명 그 옷을 입은 자기 모습을 상상하고 골랐을 것이다.
청소년기는 방학이면 서울서 내려오는 대학생 언니가 던져주는 옷들이 진리였고 20대부터 본격적으로 녕도 몰랐던 취향이 나오기 시작하는 지점이었을 것이다. 잔잔한 꽃무늬, 반복되는 자잘한 기하학적 무늬, 보일 듯 말듯한 곳에 놓인 수나 덧단, 그렇지 않으면 아예 단색에 단조로운 디자인 등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혀 튀지 않는 색깔과 무늬들, 그리고 천연 소재 옷감들에 눈길이 늘 갔다. 녕이 입고 다니는 옷들도 그때나 지금이나 때때로 빨강 패딩 같은 것들이 끼어들긴 하지만 그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이런 취향에 그나마 제일 가까운 패션 용어가 트래디셔널, 에스닉 스타일이란 걸 어쩌다 알게 되었다. 트래디셔널, 은 그 뜻처럼 어감도 딱딱하지만 에스닉, 이라는 단어는 왠지 발음부터 바람이 살랑이고 자유가 느껴져 뜻풀이를 보아도 정확히 와 닿진 않았지만 녕은 계속 에스닉해지는 게 낫을 것 같았다. 그래, 에스닉 스타일!
이렇게 나름 패션 스타일이 있는 녕이 도저히 용납 안 되는 무늬가 있었으니, 그건 호피 무늬다. 사실 용납이 안 되는 줄 잘 몰랐다. 집안에 그 무늬를 가진 물건이 들어오기 까지는. 세상의 언니들은 자신은 갖기 싫고 남 주기도 아까운 물건은 동생에게 주는 것일까. 동생이 없는 녕은 알길 없지만 언니 이숙을 보면 분명 그러함에 틀림없다. 느닷없이 가죽끈이 있는 호피무늬 에코백을 다른 거랑 슬그머니 쥐어주고 가버린 것이다. 그전에 준 바바리는 잘 입고 다니면서 에코백은 내 취향 아니라고 거부하기엔 분위기 파악을 좀 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녕은 마지못해 받아 들고는 어디에 둬야 될지를 몰라 잠시 서성였다. 한 번도 몸에 걸쳐본 적 없는 호피무늬, 집안 어딘가에서도 본 적 없는 호피무늬가 주는 생경한 분위기가 살짝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다른 에코백들처럼 베란다 구석 아무 데나 구겨 넣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아들방 옷장 손잡이에 얌전히 걸어 두기로 했다. 거의 문이 닫혀있는 방이니 눈에 안 띄게 잘 보관해둔 것 같아 녕은 안도감이 들었다.
호피무늬의 존재를 잊은 며칠 후, 그전에 치워놨어야 되는데, 방 주인이 나타남으로써 다시 살아났다. 저게 뭐야? 왜 내 방에 저런 게??? 어... 이모가 준거라... 녕은 베란다에서 하던 일을 멈출 수 없어 안방에 갖다 놓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또 이어지는 집안일에 한참을 부엌에서 동동거리다 핸드로션을 찾으러 안방에 들어갔다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 가방을 또 발견한다. 반사적으로 집어 들고는 또 안방을 서성거렸다. 어디다 둘까. 옳지! 장롱과 화장실 입구 벽 사이 옷걸이 밑에 말아서 두었다.
다음날 녕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옷장에서 겨울 옷을 찾는다고 들쑤시다 간만에 옷장 정리까지 하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나도 안 입거나 낡은 옷들을 재활용 박스에 넣을 참이다. 옷을 뭉치며 어디 담을 마땅한 가방을 찾다가 문제의 호피무늬 에코백이 눈에 딱 들어왔다. 녕은 생각했다. 아무렴 내가 저 에코백을 들게 될 날이 있을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 재활용 박스에 함께 넣자. 한마디로 재활용! 필요한 사람이 요긴하게 쓸 수 있게 하는 거지 버리는 게 아니잖아.
나간 김에 산책도 할 겸 채비를 하고는 작은 옷가지들은 호피무늬 가방에, 큰 거는 손에 들고 아파트 마당 벚나무 아래 재활용 철제 박스 앞에 섰다. 큰 것부터 넣은 다음 가방 안에 있는 작은 것들을 꺼내어 넣었다. 옷들이 미끄러져 내려갈 때마다 찌그랑 울리는 작은 쇳소리가 대낮의 햇살과 다르게 좀 서늘하다고 녕은 문득 생각했다.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어쨌든 슬픈 일이다. 마지막으로 호피무늬 에코백을 넣을 차례다. 녕은 왠지 머뭇거리며 한 번 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언니가 준 새건대... 손에는 폰과 머플러, 그리고 에코백이 있다. 슬그머니 폰과 머플러를 백에 넣고 어깨에 둘러매어 본다. 끈이 길어 어깨가 편하고 손을 넣은 외투 호주머니가 비어있어 좋았다.
녕은 호피무늬 에코백을 매고 지난여름 물이 넘쳐났으나 이젠 작은 개울 소리만 들리는 월문천을 지나서 산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들어선 산도 못 온 사이 많이 변해 있었다. 무성했던 잎들이 떨어지고 까마귀 소리에 쓰러진 고사목들의 형체가 드러나니 흡사 판타지 공간에 들어온 듯 을씨년스러웠지만, 녕은 계절이 주는 신비에 넋이 빠져 어깨에 매달려 있는 호피무늬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리고 걷고 있었다. 어쩌면 호피무늬도 있어야 할 곳에 온 듯 긴 호흡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멀리서 보면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힐끔힐끔 움직이는 녕과 호피무늬는 겨울산 한 자락이 되어 각자의 시간에 잠기어 있는 듯했다.
산길을 내려와 강변을 돌아 동네 어귀 마트에 이르렀다. 녕은 필요한 물건이 몇 개 생각나 잠깐 들러 나올 참이었다. 이젠 정말 에코백이 필요해졌고 오히려 몸에 붙어있어 안보이니 호피무늬에 대한 생각이 일지 않아 조금 편안해졌다. 필요한 거 몇 개만 사고 후딱 나오려 했지만 녕은 자꾸 다른 물건들에 기웃거려진다. 김장철이라 나온 다양한 스텐 김치통 매대 앞에서 녕은 이것저것 들어보며 살까 말까 고민 중이다.
어머, 이거 어디서 사셨어요?
예쁘다!
녕은 느닷없이 들리는 소리에 휙 돌아보았다. 근처 온통 황토색 빛깔인 온열기 매대 앞 판매원 여인만이 생글 미소를 띠며 분명 녕쪽을 보고 있었다.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녕은 단박에 작년 겨울에도 그 자리에서 황토 맥반석 매트를 팔고 있었던 그 여인이란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매대 앞을 기웃거리다 눈을 맞추어 버린 그녀의 열정적인 설명을 잔뜩 듣다가 결국 다음에 살게요로 실망시켰던 상황도 떠올랐다. tv에 나오는 중년 배우처럼 화장을 곱게 한 예쁜 얼굴이었는데 1년 사이 이마에 세월이 새겨져 버렸네...
네? 뭐가요???
매고 계신 호피무늬 에코백요. 저도 저 무늬를 갖고 싶어서 온 인터넷을 뒤지다 결국 못 사고 말았어요. 근데 매고 계신 걸 보니 역시 이쁘네요.
그런가요... 전 누구한테 받은 건데... 사실 제 취향은 아니에요.
.... 마음 같아선 드리고 싶은데 시장 본 물건들이 들어 있어서...
아, 아니에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기가 머쓱해 녕은 스텐 김치통을 다시 보는 척하다 계산대 방향으로 걸어 버렸다. 그녀가 안 보이자 에코백을 내려 들고는 정면으로 보았다. 다시 매고 거울 매장 전신 거울 앞에서 가방 멘 쪽을 돌려 보았다. 도대체 뭐가 예쁘단 말인가??? 녕은 자기 몸과 호피무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전히 생각했다. 계산대 쪽으로 걸어가면서 계속 그녀의 말이 밟힌다. 예쁘다고? 그렇게 예쁘다고...
녕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계산대 근처에 장바구니가 보였다. 어디 급한 약속이라도 있는 듯 장바구니 쪽으로 뛰어가 호피무늬 에코백 속에 있는 물건들을 와르르 쏟아 놓고는 그 에코백을 들고, 왔던 길을 되돌아 바삐 걸었다. 그녀에게 주기로 마음먹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 사이 그 매장이 철거할 일은 없겠지만 그녀가 옆 매대에 맡기고 어디 볼일 보러 가면 어떡하나.... 쓸데없는 생각까지 하며 녕은 매장 골목들을 요리조리 돌아, 마음이 급하니 그렇게 되었다, 황톳빛 매장을 드디어 발견했다! 손님을 기다리며 서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크게 보였다.
저기요, 이거 가지세요! 오늘 사실 이 무늬가 집에 있는 것도 부담스러워 어떻게 처리하나 고민하다가 들고 나왔거든요. 근데 이렇게 예쁘해주시는 분을 만나서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공으로 얻은 물건은 좋아하는 사람이 주인이에요. 예쁘게 쓰세요!
결혼식 부케 받은 하객처럼 당황에서 기쁨으로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녕은 날아갈듯한 기분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인 기다리는 장바구니 쪽으로 또 바삐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