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받았겠지요. 하 하! 너무 오래전 일이라.... 느닷없이 거제동 외숙모, 라 뜬 전화기에서 들리는 고령의 목소리는 내 외숙모가 아닌 남편의 외숙모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새댁이 시외갓집에 친정 조카를 들인,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오지랖퍼 노릇을 한 적은 있지만 25년 전 일을 정확히 기억할리 없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간간히 들리는 소식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90이 다 되어가는 외숙모가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질부에게 전화를 해 이렇게 물어보는 상황은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더라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과정이란 걸. 워낙 깔끔하고 예민한 성품이 그러고도 남을 분이다. 아무리 아는 사이라지만 둘째 며느리를 중매한 이에게 그냥 있지는 않았을 텐데, 물론 자신의 기억을 의심할 예기치 않은 사건이 그 당시 있었지만 말이다. 지금 기억에 없으니 이 노인네는 불안하다. 그 불안에 내 대답도 어정쩡했다. 그냥 단호하게 받았다고 말해버릴걸, 금방 후회했지만 계좌를 대라는 외숙모의 성화에 이렇게 되물었다.
- 외숙모님, 저한테 오늘 돈을 주셔야 편안하시겠어요?
- 응!.... 고맙네.
그해 설날 아침은 살얼음판이었다. 다른 집들은 차례상을 물리고 아침식사까지 다 마칠 시간에 해영의 시댁은 그제야 제사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명절날 배가 고파 되겠나, 부엌 쪽을 향해 가시가 돋친 말을 해대기 시작하는 동섭의 말에 허둥거리며 울그락불그락하는 경애의 표정을 뒤로하고 해영은 부엌 베란다로 살짝 나가 창문을 빠꼼히 열었다. 남자들 아침상을 빨리 차려내야 하지만 슬로비디오처럼 굴러가는 현실 앞에 마치 가위에 눌린 듯 밀려오는 극도의 갑갑함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바깥공기를 기꺼이 맞아들여야 했다.
경애는 한 달 전부터 시장을 간간히 보고 며칠 전부터는 잠을 설쳐가며 제사를 준비하지만 항상 명절 당일날 제사가 늦고 동섭은 배가 고프다고 짜증을 내고야 만다. 해영은 이 어른들 생활방식이 번번이 만들어 내는 기막힌 상황, 결코 개선되지 않을 미래를 생각하며 지나온 몇 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 집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마에 고개를 박고 손으로는 수육을 숭당숭당 썰어가며 며느리를 다급하게 부르고 있는 경애의 목소리가 꽉 닫힌 유리문을 통과했다.
- 야야, 어디 있네? 빨리 상 들어가야지!
- 네, 가요, 어머니...
제기와 아침 먹은 그릇들이 온 부엌에 아직 널브러져 있는데 벨이 울리고 세배하러 오는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주로 경애의 친정 조카들로 큰언니네 결혼 안 한 노처녀 딸들, 큰 오빠네 아들들과 그 아이들이 명절이면 이모집이자 고모집인 이 집에 모여든다. 이들이 들어서면 해영은 잠깐 부엌을 나가 인사를 하고 조카들에 둘러싸인 경애를 대신해 다과상을 차리고 시댁의 별미인 빈대떡을 연신 기름을 튀어가며 부쳐낸다. 그리고 이들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다가 한 청년을 발견했다.
- 어머니, 오늘 못 보던 도련님이 왔던데 누구예요?
- 아, 동현이? 외아저씨 셋째 아들... 고시 공부한다는 애 있잖아, 왜애. 몇 번 하다 안 돼서 이번에 취직을 했나 봐.
그동안 못 오다가 오늘 왔네. 외아주머니가 이제 장가보낼 거란다. 우리 원이도 가야 되는데...
- 그렇구나...
그때 불쑥 큰집 큰오빠의 딸 기영이 떠올랐다. 해영이 당고모가 되지만 둘은 두 살 차이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소꿉친구이기도 하다. 동네가 뚝 떨어져 친구가 별로 없었던 해영에게 인근 도시에 살다가 방학이면 찾아오는 건너편 큰아버지댁 손녀 기영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큰아버지가 조카와 손녀의 이름을 마치 자매처럼 같은 돌림으로 지어서였나. 둘 다 큰 눈이 닮아 있었고 방학 내내 붙어 다니며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고 또 지치도록 함께 노는 모습이 여느 자매들 같았다. 한여름과 한겨울은 시냇가와 들판을 쏘아 다니다가도 어느새 양지바른 곳이나 향이 그윽한 보라빛 꽃을 가졌던 등나무 그늘에 얌전히 앉아 소꿉놀이하는 어린 소녀들의 계절이었다.
해영이 도시에 있는 여고로 진학했던 그 해 가을, 기영의 엄마, 그러니까 집안의 종부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달리하는 일이 일어났다. 노환으로 몇 년째 앓아누워 계시던 큰어머니가 아니라 올케 언니가 먼저 죽어 충격적이었지만, 그리고 기영과 이젠 같은 도시에 살고 있어 달려갈 수 있었지만, 해영은 어설픈 위로라도 한마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창 새로운 환경의 학교생활과 친구들 재미에 빠져 있었고 사춘기 이후 소원해진 관계는 사촌 올케 언니의 죽음과 기영의 슬픔이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해영은 선명히 기억한다. 그 무렵 하숙집으로 느닷없이 찾아온 기영의 두서없던 눈빛을. 주말에 집에 가지 않은 친구들과 하숙방에 모여 놀고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미닫이 문을 열자 흘러나간 희희낙락하던 방 안 공기와 쏠린 눈빛들에 찾아온 이는 난감해져 버린 듯했다.
- 어 ... 저...
- 기영아... 웬일이야...?
어두운 전등 아래 오뚝하니 서있던 기영은 어른들 심부름을 온 것인지 대뜸 누군가의 주소를 묻고는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서둘러 가버렸다. 해영은 어쩐지 지금 외롭지 않은 게 조금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다가온 제삿날 큰집에 가보았지만 큰며느리를 잃은 그곳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쩌다 다쳤는지 기영은 한쪽 팔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퉁퉁 부은 얼굴엔 짜증과 무력감이 서려 있어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았다. 서먹해져 버린 10대의 끝자락은 그렇게 흘러갔다. 조금은 긴장하며 맞았을 20대는... 서로에 대한 기억 한 자락 없을 정도로 몸과 마음이 멀어진 날들이었다.
기영이 다시 연락을 해온 건 해영이 둘째를 낳고 불어닥친 IMF 환란으로 마지못해 시댁에 들어가 고단한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인천에서 미술학원을 하고 있다는 기영의 목소리는 우울했던 지난 시절을 완벽하게 통과한 듯 쾌활하고 정다웠다. 그러니까 그 무렵, 그동안 엇갈리고 무심했던 시간들이 무색할 정도로 전화로 종종 서로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할 그 무렵, 해영은 무엇에 홀린 듯 남편의 외사촌을 보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머릿속에서 줄을 그어 그만 기영과 연결시켜 버렸다. 가끔 상상이 현실로 되는 게 쉬울 때도 있다.
더위기 막 시작될 때쯤, 바다가 시원하게 보이는 오래된 호텔에서 기영과 동현의 전통혼례식이 있었다. 아들은 고시 패스를 하지 못했지만 기영의 시아버지 될 분은 한때 잘 나갔던 판사 출신 변호사이고 그 곁에서 명성과 재력을 누리고 사는 아내 인주에게 아들 동현의 결혼식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어야 했다.
해영은 호텔 로비를 들어서며 오늘 이 결혼식에 깊숙이 관여한 일이 여전히 어색하고 불안하기까지 했다. 나이 든 시동생 장가를 못 보내 애태우고 있는 경애 마음을 알기에 자신이 동현의 결혼에 다리를 놓는 걸 인주와 의논하여 비밀에 부치기로 한 것이다. 동현에게 기영을 소개해 준 인물로는 공식적으로 동현의 둘째 형수를 내세웠다. 거기다 어제, 결혼식 전 날 일어난 전대미문의 사고는....
겉모습으로 기영의 집이 한참 기우는 이 결혼, 시골 양반에 붓글씨로 이름난 한학자 할아버지를 둔 배경이 인주의 호감을 얻었지만 기영의 집에선 여러 가지로 버거웠다. 양가 서로 약식으로 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빈손으로 딸을 보낼 수 없다고 기영의 새엄마가 이바지 음식을 주문해 결혼식 전날 보낸 게 화근이었다. 더위가 시작된 여름에 오직 모양 내기에만 온갖 정성이 다 들어간 그 음식들은 근처 잔치 기분으로 모인 일가친척들을 식중독으로 초토화시켜 버렸다. 동현의 작은 어머니, 경애를 포함한 고모들, 인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주로 나이 든 여자들이 증상이 심해 인주는 결국 결혼식장에 가지도 못하고 병원에 입원하는 사달이 났다.
신랑 엄마가 나타나지 않은 결혼식장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 아는 체하는 서울서 온 다른 외숙모들 사이에서 해영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 도대체 이게 무슨 일 이래... 결국 형님이 아들 결혼식에도 못 오게 됐잖아...
- 질부, 그래 신부가 자네 친정 조카라며...
- 그래, 어머니는 어떠셔? 이 여름에 다들 고생하시네... 쯧쯧...
해영은 흥건한 국악반주가 흐르는 홀 멀찍이서 전통 혼례복을 입고 마주 서있는 기영과 동현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외아주머니를 무슨 낯으로 뵈나?
기영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해영은 밑반찬 몇 가지를 만들어 외갓집으로 향했다. 이렇게라도 해야할 것 같았고 식중독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 못한 인주 병문안 겸 기영을 보러 간 것이다. 단아하게 올린 머리에 한복을 곱게 입은 기영의 모습은 아름다웠지만 얼굴엔 불안함이 역력했다. 엄마 돌아가시고 힘들어 하던 그 시절 기영이 떠올라 해영은 착잡해진 마음을 애써 감추며 위로한다는 말이 이렇게 나와 버렸다.
-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 가지고....
- .... 꼬이긴 뭐가 꼬여! ?
꼬이지 않았고, 앞으로 무슨 일이든 절대로 꼬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단단히 묻어났다. 기영의 새엄마 상순이 해영에게 그 일 이후 매일 전화해 넋두리를 하면서 '일이 꼬여 가지고'란 말을 연신 해대는 바람에 해영의 입에서도 불쑥 나와버린 말이다. 해영은 이차! 싶었다. 말을 잘못했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단순 사고일 뿐인데 해영은 오히려 당사자들보다 더 바늘방석에 앉은 기분이다. 인주도 안절부절못하는 해영을 보고 자네가 그럴 필요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이미 일어난 불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어이없는 사건 언저리에 있던 모두는 그랬을 것이다.
기영의 결혼 생활은 화창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애를 좀 태웠지만 자신을 꼭 닮은 딸을 한 명 낳았고 동현의 근무지 따라 부산과 수도권을 옮겨 다니다 경기도 성남에 정착했다. 해영은 부산에서 또 꼼지락거리며 살았다. 명절이면 언제나 남편과 아이들은 서로의 시댁으로 인사를 하러 여전히 오고 갔지만 며느리인 해영과 기영은 부엌을 벗어날 수 없어 만날 일이 거의 없었다. 큰며느리랑 사이가 안 좋은 인주가 기영에게 많이 의지하고 기영도 시어른들한테 잘한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렸을 뿐 해영은 기영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가깝고도 먼 사이의 날들이 이어졌다.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대에 망자가 가는 길은 어떨까. 외숙모는 남편을 보내자마자 살던 부산을 떠나 자식들이 있는 서울로 거처를 옮겨 또 당신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한 달을 그렇게 계시다 가셨다. 자식들 입장에서는 연달아 부모님을 여의게 되었지만 외숙모다운 깔끔한 마무리다. 결혼하고 부산에서 쭉 살았던 나도 오십이 되던 해 뜻밖에 수도권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예전에 시골에서 기영이 있는 도시로 갔던 것처럼 또다시 기영과 가까워졌지만 일부러 연락하고 그러지 않았다. 우린 또 이렇게 만나게 될 것임으로.
- 야아~ 오랜만이다! 외아주머니 올라오셨다는 소식은 어머니한테 들었는데 이렇게 바삐 가실 줄 몰랐네...
- 일주일 전부터 곡기를 끊어셨어.... 음식을 넘기지 못하니까...
- 그랬구나.... 병원도 안 가시고... 참 의지가 대단하시다... 넌, 어떻게 살았니?
- 뭐? 무슨 그런 깜찍한 소릴... 얼굴살이 내 평생 컴플렉슨데 이제야 빛을 보는군, 음하하! 근데 곧 주머니처럼 늘어질 것 같아.
어둠에 반짝이는 한강, 길 따라 집으로 돌아오며 그동안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을 떠올렸다. 내 앞날도 안갯속이었던 그 시절에 왜 내가 기영의 인생에 불쑥 뛰어들었을까. 그날 밤 나를 찾아왔던 기영의 외롭고 슬펐던 눈에 화답하지 못했던 부채감이었을까. 다시 나를 찾았을 때 따뜻해 보이는 집이 보이자 무조건 기영을 들여보내고 싶었다. 덩달아 그녀의 인생도 따뜻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어디에도 누가 만들어 놓은 따뜻한 집은 없었고 우리는 다만 살아내기 위해 지금까지 애쓰고 있을 뿐이다.
70년생, 나, 해영, 기영은 웬만하면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았습니다. 80년대 따로 비슷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90년대 대중문화 융성기에 휩쓸리다 아엠에프에 한방 맞고는 어른 노릇의 길로 접어들었고요. 90년생 아이를 키우고 나니 라떼는~ 이 되었지만 그러면 안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든든한 울타리에서 다시 아이가 되어버린 부모님 세대를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기도 다른 세상으로 보내드리기도 하는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