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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Mar 19. 2021

덕희

장날

친구의 시작은 덕희다. 또래로부터 편하고 따뜻한 느낌을 받은 건 덕희가 처음이었으니까.

막 2학년이 된 우리들, 1학년 동생들에게 학교는 처음이지, 보란 듯 천방지축 아무 데나 뛰어다녔다. 봄기운은 또 얼마나 아이들을 가만히 앉아있질 못하게 하나. 4교시 땡!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 밖을 나갔고 그날은 교문밖으로까지 진출했다. 장날이다! 오일장은 아이들이 장돌뱅이가 되는 날이다. 아무 볼 일도 없으면서 떼를 지어 어슬렁 거린다. 나도 덕희도 미경도 작은 개울길 따라 한 무리의 스프링벅처럼 장으로 향하는 아이들 속에서 뛰고 있었다. 눈을 돌리고 보니 그 아이들이 가장 가까웠다. 덕희가 들고 있는 감색 보조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 야, 니 자유학습의 날 가방 어디서 샀네?

- 어, 이거? 학생당에서.

- 학생당... 거기 어딘데? 나도 사야 되는데.

- 가르쳐 줄까? 내 따라와.

처음 말을 걸었는데 너무 쉽다.

가던 길을 시장 쪽이 아니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시내 문구점 쪽으로 바꾸었다. 어쩐지 앞서가는 숏커트 머리 덕희에게서 어디든 친절하게 데려가 주고 따라가 줄 것 같은 따스함이 흘러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

덕희와 미경이 사는 밤골은 우리 집 대문 밖을 나가 오른쪽으로 50M 정도 걸어 멀리 응시하면 보이는 동네다. 이름처럼 동네 야산에 밤이 많았지만 여름이면 참외, 수박농사를 많이 지어 양동이를 들고 들판길로 과일을 사러 가던 곳이다. 대낮에 마을 여기저기 황토밭을 지날 때면 깨진 수박 빨간 속살 사이로 더운 단내가 훌훌 풍겼다. 학교에서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 앵골이라는 곳에 이르면 밤골과 우리 동네 가는 길이 갈라진다. 학생당 문구점에서 내 초록색 보조가방을 함께 산 이후 우리는 언제나 붙어 다녔고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매일 실랑이가 벌어졌다. 둘이서 내 손을 잡고 밤골 가는 길로 끌어당기고 난 안 가겠다고 버둥거리고, 근데 얼굴은 실실거리며 못 이기는 척 언제나 그쪽으로 따라가고야 만다. 양쪽에 복숭아밭, 자두밭이 즐비한 그 길을 걸으며 덕희는 호기롭게 서리라는 걸 몸으로 보여 주기도 했다. 절대 혼자서는 못할 과일 서리에 덕희가 앞장서고 미경과 난 그 뒤를 따르며 가슴에서 방망이질 치는 열개 아니 스무 개 정도의 북소릴 들어야만 했다. 덜 익은 자두를 베어 물고 뱉기를 반복하며 닿은 다리 밑 냇가 웅덩이는 우리들 하굣길 마지막 여정, 가방을 던져두고 멱을 감는 곳이다. 첨벙거리며 놀다 헝클어진 머리와 젖은 몸을 부딪히며 잘가를 여러 번 고래고래 외쳐야만 진짜로 헤어진다.


운동회

운동회의 꽃은 마지막 릴레이다. 5학년 가을,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전 학년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릴레이 경기를 잊을 수 없다. 청군의 승리가 확고해질 때쯤 백군의 마지막 주자 덕희가 뛰기 시작하자 전세는 기적적으로 역전되어 백군의 승리로 끝나고 만 것이다. 물 찬 제비처럼 날으듯 달리는 덕희를 응원하는 소리는 가을 하늘을 찌를 듯했고 tv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한동안 인기를 누릴 정도로 그날의 활약은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었다. 덕희가 달리기 실력을 인정받아 방과 후 육상부로 발탁되면서 우리들 하굣길 기억은 끊어진다. 설사 이어졌다 해도 모습은 달라졌으리라. 더 이상 우린 서리 같은 게 재미없었고 벌건 대낮에 냇물 같은 델 뛰어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대신 우리 반 반장 석호 (육상부것들!)가 덕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가슴에 콕 박혔다. 초록 바지에 노란 선 두줄이 가로로 그어진 밤색 니트 티를 입었던, 또 카라가 있는 회색 티도 있었지, 석호를 기억한다. 시원치 않았던 이빨도 곱슬머리도... 언젠가부터 그 아이만 내 눈에 들어왔으니까.


뒷모습

중학교는 새롭고 조금 재미있었다.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들, 갓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시골학교에 발령을 받은 젊은 선생님들 열정에 사춘기 십 대의 혈기가 모인 교실은 늘 뜨겁고 떠들썩했다. 여름 교복을 딱 한 철만 입고 곧 복장, 두발 자유화가 되었다. 한창 외모에 민감할 때였지만 내가 무슨 옷을 입고 어떤 머리 모양을 했는지는 기억에 없고 덕희의 모습만 떠오른다. 아주 가끔 교정에서 마주치면 우리 사이에 아무런 장애물이 없음에도 이젠 다른 세계를 사는 듯 어색한 미소만 짓고 서로 지나쳤다. 또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듯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더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던 어느 가을날 오후, 운동장을 걸어가는 뒷모습이 들어왔다. 덕희가 맞았다! 여전히 짧은 숏커트에 베이지색 잠바와 짙은 청바지, 힘이 들어가 보이는 양손, 근육으로 단단해 보이는 다리를 끌듯 건조하게 쓸쓸하게 노을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낯설었다. 친구였을 때 덕희는 언제나 짓궂고 힘이 셌던 어린 소년과 닮았었지만 어깨동무를 하면 손의 감촉이 다른 아이들과 달랐었지만....


덕희는 덕희

내가 사는 도시의 바다가 가까운 구도심에서 한약 재료상을 한다고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시골 소녀들이 갔던 전수학교를 덕희도 갔었지. 낮에 한의원 보조 간호사로 근무하다 어깨너머로 본 침술, 탕제법은 덕희가 세상에서 가장 배우기 쉽고 몸에 꼭 맞는 일이었다. 남다른 제자를 원장도 알아봤는지 학문이 아니라 기술로 전수했고 독립한 덕희는 날개를 단 듯 온 가족을 먹여 살릴 정도로 돈을 잘 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고향 마을은 궁금하지 않은 누군가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라 주로 누구 집 아들 고시패스 사업성공이 주를 이루었다면 누구 집 딸은 덕희가 유일했다. 동창들 사이에서도 돈 잘 내고 어려운 친구에게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큰손으로 통했다.


바닷가 봄바람이 살랑이던 구도심의 공기는 추억이 묻어났다. 덕희 가게 건물이 있다는 유명 시장 근처에 갔다가 전화를 하고 말았다. 잊고 있었을 내 목소리에 덕희는 놀라움과 반가움을 금치 못하고 당장 시장 모퉁이로 달려 나왔다. 아, 몸을 좌우로 돌릴 때마다 남자와 여자로 변신하며 노래를 부르던 트로트 대회 출연자처럼, 노을 속 소년의 뒷모습을 돌려세우자 시간까지 훌쩍 널뛰기를 하여 짙은 화장에 올림머리를 한 중년 여인이 되었다! 목소리엔 긴장감이 서려있다. 굵어진 목소리를 숨기려는 듯 가성을 내며 천천히 조곤조곤 얘기했다. 착한 남편을 만났고 하나도 닮지 않은 아들 사진을 보여주며 여느 엄마들처럼 교육을 걱정했다.


석호는 어떻게 되었니? 오래도록 상사병 소문이 나한테까지 들리더라...

음... 석호는 그냥 친구지, 나... 그 녀석 받아들일 수 없어... 참... 나이 들도록 결혼도 않다가 겨우 얼마 전에 지를 무지 좋아하는 여자랑 했네. 요즘도 가끔 와이프랑 우리 집에 약 지으러 와. 와이프가 날 언니라 불러, 하하!

그렇구나...

너, 심방골 살았던 은숙이 알지? 걔 요즘 자주 만나거든. 밤늦도록 한잔하고 놀다가 헤어지기 싫어서 걔네 집과 우리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걸어. 우리 웃기지...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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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야! 살다가 힘든 일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알았지?

그래, 너도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해. 행복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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