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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Nov 06. 2020

앉아서 하는 여행

몸으로 읽는 책읽기가 안될 때

여행을 '몸으로 읽는 책', 책 읽기를 '앉아서 하는 여행'에 비유하기도 한다. 작정을 하고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이라는 테마로 하는 책모임은 그래서 그 의미가 두배로 다가온다. 게을러져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도 일단 특정 나라에 한 발짝 다가서 관련 책들을 읽고 톡방에서 다른 회원들과 글을 공유하며 짧게라도 얘기를 나누고 나면 어떨 땐 발로 하는 여행보다 훨씬 충만해진 기분이 다. 이 상태로 그곳으로 떠나면 완벽한 여행이 되겠지만... 가지 않아도 좋다. 확인하지 않아서 더 많이 상상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저번 달에는 포르투갈 여행을 떠났다. <리스본/박종호/ 풍월당>이라는 여행기와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그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책을 읽고 싶었지만 마음의 여유를 못 찾아 결국 영화만 봤다.


<리스본>은 음반가게 풍월당에서 펴내는 문화 예술 시리즈 중 하나로 클래식, 오페라 칼럼니스트인 주인장 박종호가 25년간 다닌 유럽 도시들 중 첫 번째는 당연히 잘츠부르크를 두 번째를 놀랍게도 리스본을 선택했다. 예술에 심미안을 가진 저자에게 여러 도시들 중 포르투갈과 리스본이 얼마나 특별하게 다가왔는지 알 만 하다. 30년 전, 아니 100년 전까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포르투갈로 떠나는 것이라 했다. 만약 포르투갈에 도착하면 더 이상 포르투갈이 아니라 누구나의 어린 시절 추억과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과거의 나라가 그곳이라고. 레트로 감성을 좋아하는 내겐 완전 취향저격이라 설레며 쭉 따라가 보았다. 리스본이라는 도시를 구역으로 나누어 골목 구석구석, 건축물, 관련된 인물들, 책 등 꼼꼼하게 결코 블로거나 카페에서는 얻을 수 없는 보석 같은 정보들이 사진과 함께 수두룩 했다. 실제로 리스본 여행을 떠나도 이 한 권이면 충분할 정도로 문화 예술에 해박한 현지인 가이드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여행기로 리스본에 살짝 다가갔다면 거기서 언급한 작가들의 문학작품이 읽고 싶어 진다. 우리에게 <불안의 서>라는 산문집으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시인,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 - 1935)를 그냥 넘길 수 없어 제목이 격하게 와 닿는 시집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을 음미해 보았다. 페소아의 다른 책들은 난해하다고 원성이 자자했지만 이 시집은 생각보다 잘 읽혀 고마웠다. 세상이 생겨난 모습 그대로 느끼고 간직하고 싶어 하는 시인의 순수한 마음이 닿아서일까. 인류를 나아가게 한 생각이나 철학 같은, 어쩌면 이 관념의 세계는 이 시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시인의 세상에서는 일상으로 규정하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먼지 한 점이 오히려 움직임으로 기억될 듯. 특이하게 70명이 넘는 이명(異名)으로 쓰인 작품들이 사후에 엄청나게 발견되어 작가로 인정받은 그의 흔적들은 고향인 리스본 곳곳에 새겨져 있다.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도 원작에 대한 독서욕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좋았다. 첩보물로 상상을 했었는데, 혁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무료한 삶을 살아내던 스위스의 노선생에게 불꽃같은 열정이 되살아나는 상황이 우연히 찾아오고, 리스본행 야갼열차를 타고야 만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 도시 리스본을 노선생이 여기저기 다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방인인 그의 발품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한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의 혁명(카네이션 혁명)과 사랑에 관한 고뇌는 포르투갈의 지리적 위치처럼 쓸쓸하고 극적이다. 이베리아 반도 끝에 매달려 있는 포르투갈, 유럽 중심 사고로 세상의 끝이라고도 표현하는 그런 곳이다. 한때는 세상을 호령했으나 쇠락하여 영광이 스러지는 곳이지만 여행자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여행과 관광의 차이를 알고 보니 첫 외국 여행지였던 체코 프라하는 관광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고맙게도 프라하에 지인이 살아 겸사겸사 가서 대부분 유명한 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남겼다. 카를교를 걷고 프라하성을 둘러봐서 좋았지만 카프카 관련 장소나 알폰스 무하 미술관 같은 델 가면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카프카 책을 읽은 게 없었고 무하는 잘 몰랐던 화가라 그림이 지루했다. 오히려 다녀온 후 알폰스 무하 전기를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해 읽게 되었고 서울에도 정기적으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는 미술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또 체코에는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 급 '카렐 차페크'라는 국민 작가가 있었다.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문학성이 뛰어났으나 나치를 비판하는 정치성향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로 체코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놀랍게도 '로봇'이란 단어가 1920년에 나온 그의 희곡 <R.U.R: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에 처음으로 등장해 오늘날 보통명사가 된 것이었다. 소설, 희곡, 신문기사, 수필, 동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많은 작품을 썼다. 그중 마음을 사로잡은 건 정원 에세이집 <정원가의 열두 달>과 온갖 종류의 평범한 사람들의 희한한 미스터리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단편 소설집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다. 이 책들을 읽고 만약 다시 프라하를 가게 된다면 정원가의 열두 달에 해학적인 삽화를 그려준 형 요제프 차베크와 나란히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었다는 '비노흐라디' 라는 장소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딴 거리를 거닐고 정원가의 충족될 수 없는 열정의 나날, 열두 달이 담겨있는 정원에 서보게 되리라.


관광을 다녀오던 여행을 가고 싶던 앉아서 하는 여행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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