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다른 계절을 다른 시간을 다른 장소를 꿈꾸게 한다. 이런 장면들은 어떨까.
3시가 지나자 해가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검은 망사가 내려앉은 듯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더니 1초가 다르게 색이 사라졌다. 3시 20분 무렵 초승달 같은 태양이 마지막 빛을 비명처럼 번쩍 내지르고 사라지자 사방이 완전히 깜깜해지고, 검은 해 주변에 파랗게 빛나는 코로나(태양 대기의 가장 바깥층에 있는 엷은 가스층. 개기일식 때만 볼 수 있다.)가 보였다. / 라세레나의 개기일식
천문학자들은 마우나케아 산 정상에 있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망원경을 포함해 지구 상 여덟 곳에 있는 전파망원경으로 처녀자리 A은하 중심부를 24시간 들여다보았다. 빛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한 점 한 점 모으고 찍어 붉은 고리를 만들었다. 그러자 고리 가운데 검은 형태가 드러나면서 드디어 블랙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블랙홀은 이렇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 우주에 숨어 혼자이고 싶은 존재는 없다. / 저기 어딘가 블랙홀
천문학과 관계없이 하와이의 명물인 낙조를 보기 위해 마우나케아산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들 대부분이 산꼭대기에 올라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4,200미터 높이까지 올라오느라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처럼 바보 같은 짓이 없다. 오히려 반대쪽을 봐야 한다. 해가 지면서 생기는 마우나케아산의 거대한 그림자가 구름 위를 꾸물꾸물 기어가다 해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사라지는 장관이 펼쳐지는데, 어떻게 그걸 놓칠 수 있는가! / 마우나케아의 석양
쿠쿨칸은 '날개 달린 거대한 뱀'으로 동양의 용과 비슷하다. 이 피라미드가 쿠쿨칸의 사원으로 불리는 이유는, 춘분과 추분이 되면 일주일 동안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 계단 난간에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땅으로 내려오는 뱀 그림자가 생기기 때문이다. 마야의 건축가들은 이와 같은 효과가 생기도록 계단과 난간의 위치를 정교하게 조정해 피라미드를 건설했는데, 당시 사람들에겐 이것이 대단히 볼거리였다. / 치첸이트사의 그림자
세렝게티의 초식동물 중에서 개체 수가 가장 많은 것은 검은꼬리누다. 100만 마리에 달하는 검은꼬리누가 풀을 뜯기 시작하면 번개가 쳐도 들풀이 일어나지 않을 만큼 풀의 길이가 눈에 띄게 짧아진다. 초원에 불이 나지 않으면 나무의 싹이 살아남아 나무가 많아지고 덕분에 아카시아 잎을 먹는 기린의 수가 많아진다. 또한 긴 풀 때문에 빛을 보지 못했던 키 작은 꽃들이 마음껏 꽃을 피운다. 그리고 나비가 돌아와 세렝게티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이 모든 변화의 시작은 초식동물이 사바나의 풀을 열심히 뜯어먹어서 가능한 일이다. / 세렝게티의 왕은 사자가 아니더라
거미는 새끼를 잘 보살피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잘 알려진 것은 늑대거미로, 이들은 알을 거미줄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배에 매달고 다니다가, 새끼가 알을 까고 나오면 등에 태우고 다닌다. 이때 어미 늑대거미를 보면 덩치가 두 배 이상 커 보이고 등에는 반짝이는 보석을 붙인 것처럼 보인다. 등에 타고 있는 새끼들의 눈이 반짝이기 때문이다. / 거대한 여인, 마망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하루도 쉬지 않고 지진이 일어나고 있다. 다행히 세계 곳곳에는 엄청나게 많은 지진계가 있으며, 지구가 지진파라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만 잘 받아 적으면 지구의 속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자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그것이 설령 인간에게 큰 피해를 준다 할지라도 색다른 대화의 방법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 캘리포니아의 지진
페루에서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안데스산맥 위의 평평한 고원지대다. (...) 평평하던 땅이 갑자기 쑥 꺼지면서 거대한 계곡이 나타난다. 네모반듯한 두부를 국자로 쿡 찔러 깊은 자국을 낸 것 같은 계곡이다. 평지에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경사면에 무언가 있다. 그 위를 지나갈 때 보니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이다. 경사를 구불구불 내려가는 길도 보인다. 저런 비탈에 사람이 살고 있다니! 하지만 이건 다음에 볼 장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계곡 저 밑바닥에 높은 빌딩들이 보인다. (...) 케이블카가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순간 지평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불빛이 보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평평하게 깔린 주거지의 불빛은 본 적이 없다. 마침 낮에 뜨겁게 달궈진 땅이 급격히 식으며 공기에 와류가 생겨 주거지의 불빛이 마구 흔들렸다. 마치 지평선 전체에 반딧불이가 한가득 앉아 있는 것 같았다./ SF도시, 라파스
봄이 오면 , 날씨가 따뜻해지면, 이런 말들을 되뇌며 방구석 노예가 되어 허우적거릴지언정 바깥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 책은 작가의 바람처럼 자유를 선사해 줄 것 같다. 글은 발로 쓴다는 평소의 지론으로 어디든 달려가는 과학 논픽션 작가 이지유는 '여행의 과학'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과학지식보다는 마치 그 장소에 다녀온 듯 착각하게 만드는 세밀하고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고 다양한 분야와 접목되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파란색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는가.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서 유난히 파란 머릿수건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행성 지구에서 자연과 어울려 살 줄 모르는 현대 문명인들에게 카메라를 비춘다. 시간과 탄생, 감춰져 있으나 혼자이고 싶지 않은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묻는다. 붉은빛에 눌려 눈에 띄지 않다가 달이 빛을 가리는 순간 망설임 없이 자신을 맘껏 드러내는 코로나처럼 코로나바이러스도 인간들에게 정말 색다른 방법으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천년 동안 5센티미터로 자란 종유석을 보며 오래전 종유석이 태어난 순간에 대해 이제야 우리는 생각한다.
덤으로, 작가가 직접 배운 오목 판화로 찍은 삽화 그림에는 혼자이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 얌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서로에게 잘 있냐고 인사가 전해지는 기분이다. 세밀하고 단순해서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