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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ug 24. 2021

호주머니 속 가을

<호주머니 속의 귀뚜라미>, 레베카 커딜


처서處暑(오늘 23일)와 관련된 글이 아침 신문에 두 꼭지나 올라와 있다. 어제저녁 처음으로 부엌 베란다 쪽에서 들렸던 귀뚜라미 소리… 더워가 멈춘다는 처서란 절기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말이 있던데, 어쩜 딱 맞춰 귀뚜라미는 우리 집을 방문한 셈이다. 고맙고 신통방통한 일이지만 이 녀석 소리에 여름을 보내려니 살짝 아쉽기도 하다. 이번 여름에 뭐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고 시원하게 보낸 남모를 특별한 장소를 발견해서가 아니다. 늘 새로운 양상의 날씨에 심신이 널을 뛰고 내가 편하려면 사돈의 팔촌까지 편해야 된다는 말이 실감 나는 요즘이지만, 다시 오지 않을 올해의 여름, 그리고 그 끝자락은 언제나 아쉽고 썰렁하다.


여기까지 낮에 써놓고, 저녁 무렵 이어 쓰려니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하게 또 들린다. 어제 그 귀뚜라민가??? 이미 어둠이 깃든 베란다, 귀뚜라미가 노래할 알맞은 조건이다. 어떤 경로로 이 높은 곳에서 노래하게 되었을까.

하려는 이야기는 따로 있는데, 귀뚜라미 소리가 자기 이야기를 써 달라고 조르는 것 같다. 쓰려던 이야기가 잘 풀렸으면 눈 딱 감았을 건데 그렇지도 않아… 슬쩍 귀뚜라미 소리에 호응을 하려 한다. 그래, 지금은 너희들의 시간이니까.


이맘때쯤 책방에서 3학년 아이들에게 읽어주던 <호주머니 속의 귀뚜라미>가 생각나 써보려 하니 이번엔 책이 아쉽다. 잘 아는 이야기라 생각했지만 책이 없으니 쓰기가 불안하다. 책방 책이었고 인근 도서관에도 없고 절판되기까지 했다. 그래도 귀뚜라미에게 마음으로 써주겠다고 약속한 이상 포기할 수 없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가을에 처음 학교를 가게되는 제이는 소를 데리러 목초지를 향해 천천히 걷는 시골 아이다. 늘 걷는 곳이지만 주변 자연은 언제나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걸을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뽀얗게 올라오는 흙먼지 느낌, 팥죽색, 빨간색 색깔 따라 구별되는 사과의 달콤함과 새콤함을 알고 즐기는 아이다. 옥수수 잎 위 부지런히 굼실거리며 쉼 없이 가는 애벌레에게 하는 말, 왜 그렇게 서두르니, 애벌레야?


서두르지 않는 제이 눈에는 보물이 많이 보인다. 호주머니 속에 들어가는 보물들은 이런 것 들이다. 무늬가 있는 돌, 거위 깃털, 화살촉, 콩 그리고 친구가 된 귀뚜라미다. 엄마가 준 차망 안에서 귀뚜라미는 밤마다 제이를 위해 노래한다. 이런 친구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 첫 등교날 호주머니에 넣어가는데… 어두운 호주머니 속은 귀뚜라미가 더없이 노래하기 좋은 환경이다. 친구들에겐 놀림감이 되고 선생님에겐 밖에 내다 놓으라는 은근한 압력을 받지만 제이는 귀뚜라미를 지킨다.

제이야, 귀뚜라미가 네 친구니?


선생님의 이 물음 속엔 제이를 이해하려는 애씀이 들어있다. 이왕 받아들인 거 이번엔 '보여주고 말하기' 시간에 제이에게 귀뚜라미를 소개할수 있는 기회를 준다. 훌륭한 선생님! 선생님의 배려로 반 친구들에게 부러움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 버린 제이의 부푼 마음속엔 벌써 다음 시간에 소개할 물건까지 떠오른다. 콩, 콩이 생각났을 때 제이의 순수한 감각들이 보내준 것은 무엇일까.


호주머니 속에 자연, 가을을 넣고 다니는 제이의 생활은 자연을 느끼는 것이 자연을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레리첼 카슨의 말에 알맞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옛시절처럼 아련하다. 절판된 책을 사려면 몇배의 돈을 지불해야 되는 것처럼 많은 비용을 들이면 돌아오기는 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귀뚜라미는 어김없이 때가되면 나타난다. 마당있는 집에도 나타났고 아파트 고층에도 나타났다. 줄기차게 노래하는 소리에 잠들기 어려운 누군가는 베란다로 쫓아나가기까지 했지만 잠시 멈추는 센스까지 발휘하며 하던일을 계속했다. 이렇게  자연이 보내는 가을은 어김없이 오고 또 갈것이다.


주머니 속에 가을을 넣고 다니는 또다른 아이를 소개하며 귀뚜라미 소리에 딴길로 와버린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찬주의 바지주머니 속에 무엇이 들었나

                                                 김은영


아홉살

찬주의 두툼한 바지주머니 속에는

무엇이 들었나


끈이 얽힌 팽이하나

덜 여문 알밤하나

구슬 세개


주머니 안감

쏙 끄집어 내자

구겨진 스티커

과자 부스러기

모래알

가늘고 까만 꽃씨


찬주의 주머니 속엔

놀이가 들어있네

동무도 들어있고

가을도 들어있네


비좁다 불평없이

고즈넉이 들어 있네









<아직 유효한 8월을 붙잡으려 어젯밤 흐리고 까만 밤하늘이 보여준 동그랗게 차오른  달에 이야기를 얹어본다.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8월의 그날 밤,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지던 여우 울음소리를 간직한 소년의 이야기를. 깊은 밤처럼 새카만 검은 여우의 울음소리가 빗소리를 뚫었다.>


밀려난 검은여우 이야기, 매우 좋아하는 이야기라 자꾸 잘쓰고싶어 힘이 들어간다. 힘빼고 다음 기회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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