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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Sep 01. 2021

운자 할머니의 꿈

운자씨 아버지는 시원찮은 농부였지만 자연을 벗 삼는 시인의 마음이 조금 있었나 봅니다. 세 딸들의 이름을 설雪자, 송松자, 운雲자, 이렇게 지었으니까요. 모두 딸들이 태어난 날 눈에 들어온 자연을 넣었습니다. 첫딸이 태어난 날은 함박눈이 소복소복 소리 있게 내렸고 둘째 딸이 태어난 여름날은 논가 작달막하게 그늘을 드리운 소나무 밑에서 땀을 훔치다 아기 울음소리를 전해 들었거든요. 막내딸 운자는 가을에 태어났으니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었겠지요. 막내딸 운자 씨가 역시 자신의 막내딸에게 들려준 외할아버지 이야기인데, 진실인지 이야기 좋아하는 운자 씨가 지어낸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구름처럼 운자씨가 느긋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호랑이띠 남편을 만나면서 산통 다 깨졌습니다. 평생 성질 급하고 버럭 하는 가부장적인 남편 때문에 숨죽여 살아 가느라 가을날 느긋하게 구름 한번 쳐다볼 여유가 없었지요. 거기다 운자 씨 남편은 가스 라이팅의 대가였어요. 마누라에게는, 당신은 나 때문에 한 격이 올라간 삶을 산다, 자식들에게는, 나는 다른 아버지들하고는 다르다, 이런 말들을 달고 살았으니까요. 가스 라이팅을 당한 자식들 일부는 아버지가 떠난 지금도 그렇게 알며 살고 있는데, 운자 씨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숨죽이며 속으로 늘 이렇게 구시렁거렸어요. 무슨 말씀, 당신이 떠나야 내 삶의 격이 높아지는 거야... 딱 두 달 병원에서 앓고 저 세상으로 남편이 가던 날, 운자 씨는 아직 온기가 있는 남편의 주검을 부여잡고 알 수 있는 해방감을 꾸욱 누르며 남편의 귀 가까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여보, 나 딱 5년만 더 살고 당신 따라 갈게요. 먼저 잘 가시요이!




쿨하게 남편을 먼저 보낸 운자씨는 물 만난 고기처럼 세상을 마음껏 헤엄쳐 다녔습니다. 운자씨의 세상은 좁아 팔십이 넘은 몸으로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었거든요. 뭐… 이런 것들이죠. 먹고 싶을 때 혼자서 천천히 밥 먹기, 큰소리로 노래 부르기, 오일장 가서 마음 졸이지 않고 실컷 장보기, 손주들한테 팍팍 용돈 주기, 그리고 피부관리? 왠 팔십 노인이 피부관리냐 싶겠지만 하얀 피부 남편 곁에서 늘 주눅 들어 살아온 운자씨 인생을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지요. 거기다 그나마 남편으로부터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밭일 하느라 안 그래도 까만 피부가 까만 잡티로 도배되어 운자씨는 거울 볼 때마다 울적하였답니다.


요즘은 병원 가면 피부도 바꿔준다는 소릴 어디서 듣고는 딸들을 부추겨 마침내 시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검버섯 기미가 더 도드라져 괜한 짓을 했나 살짝 후회했지만 날이 갈수록 말금 해지는 얼굴에 스스로 놀라며 피부를 진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세수하고 선크림을 철저히 바르고 저녁이면 꼭 오이를 감자칼로 얇게 저며 얼굴에 붙였지요. 시간에 쫓길 일도, 뭐라 하는 사람도, 방해하는 사람도 주변엔 아무도 없으니까요. 하루도 안 거르고 365일 매일 그렇게 하니 운자씨 얼굴 피부는 다시 새살이 돋듯 맑고 밝은 피부톤으로 바뀌어 갔어요. 얼굴은 거꾸로 나이를 먹었지만 허리는 점점 굽어 갔지요. 그러면 어때요. 운자씨는 지팡이를 짚고 반짝이는 얼굴을 꼿꼿이 들고, 할머니가 읍내에서 제일 이뻐요, 라는 젊은 간호사들 말을 들으러 부지런히 한의원을 다녔습니다. 그것도 늘 택시를 불러서 편하게 말이죠. 호랑이 구두쇠 남편이 곁에 있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운자씨의 봄날이 그럭저럭 흘러 삼 년이 지났습니다. 이쯤 되니 뽀샤시 해진 얼굴도 원래 그랬던 것 같고, 거울 보는 일도 드물어지고, 뭐가 허전한 게, 운자씨에게 외로움이라는 그림자가 슬슬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떨어진 입맛으로 기진맥진하여 방구석을 헤매던 날  문득 구석에 방치되었던,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남편 사진이 불쑥 들어왔어요. 그토록 그에게 핍박당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나마 좋았던 날들이 떠오르는 건 웬 조화인지... 살갑지 못했던 자신도 돌아봐지고요. 주변 사람들마저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남편 죽은 후 설자 언니, 송자 언니도 2년 간격으로 세상을 달리 했지요. 다정한 이웃은 아니었지만 옆집 가라골댁도 치매가 심해져 자식들이 데려가더니 얼마 못가 죽었다는 소식이 오네요…. 막내딸이 이사 가며 맡겨놓은 강아지 정이가 겨우 운자 씨한테 정을 붙여 어디 갔다 오면 이제야 꼬리를 살랑거리기 시작했지요. 신산한 밤을 보내고 새벽에 현관문을 덜커덩 열면 아직 걷히지 않은 까만 어둠 속에서 쪼르르 달려오는 하얀 강아지 정이, 가 있어 그나마 운자씨는 외로움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답니다.


지난겨울 끝자락, 봄이 뽈록뽈록 올라올 때쯤 정이는 추운 겨울을 견디느라 힘들었는지 자주 양지바른 곳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어요. 운자씨가 먹을 걸 가지고 나와도 일어나 풀쩍풀쩍 뛰지도 않습니다. 가끔 그런 적 있어 그러려니 했는데 점점 정이는 햇볕을 더 찾고 먹을 걸 거부하더니 걸음까지 비틀거렸습니다. 여러 번 마당에서 개를 키워본 운자씨는 정이의 상태가 어떤 곳을 향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늘 이렇게 보냈기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먼저 보내는 게 더 이상 돌봐줄 사람 없는 정이를 위한 길인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운자씨는 정이를 꼭 안아 한없이 기운 없는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며 폭신한 이불을 새로 깐 집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다음날 아침 정이는 집 바깥에서 낮잠 자던 모습으로 싸늘해져 있었습니다.


밤이 되길 기다렸습니다. 동물을 함부로 묻으면 신고당한다는 어디서 들은 말이 생각나 어두워지면 몰래 나무 심어 놓은 논에 묻기로 했어요. 해가 지자 운자씨는 죽은 개를 천에 싸서 허름한 포대에 넣어 주둥이를 묶어 줄을 길게 내었습니다. 꼬부라진 허리로 지팡이를 짚고는 천천히 앞에서 줄을 끌며 아랫마을 가는 길에 있는 논에 다다랗지요. 포대를 논가에 두고 안쪽으로 들어가 두리번거려 보니 마침 나무를 파간 구덩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돌아와 이번엔 지팡이를 두고 어디서 힘이 났는지 꼬부라진 허리와 두 손으로 포대를 살짝 들고는 걸었어요. 등이 화끈거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간신히 구덩이에 도착해 안으로 천천히 포대를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허리춤에 묶어온 정이가 좋아하는 우유식빵 봉지도 풀어 함께 넣었지요. 어디서든 배고프지 말라는 운자씨의 정이에 대한 마지막 마음이었습니다. 한참을 근처 나무에 기대어 차오르는 숨을  진정시키며 어둠 속에서 수피를 가만히 더듬어 보았어요. 둘레로 까끌까끌 점들이 이어지는 게 벚나무였어요. 머지않아 꽃이 피고 정이 무덤 위로 꽃비도 내릴 테지요.


다음 날 운자씨는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마침 전화 온 큰딸이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막내에게 알리자 울먹이며 운자씨에게 전화했어요. 울긴 왜 울어! 그깟 개 한 마리 죽은 게 뭐 대수라고! 앞으로 먼저 보낼 일 많아. 마음 단단히 먹어. 난, 참! 오래 살다 보니 개까지 보내야 하고….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날 이후 운자씨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식들이 번갈아 내려와 기운 나는 음식을 해드리고 사드렸지만 몸이 받아들이질 않네요. 한번 꺾인 기운은 좀처럼 돌아올 기미가 없었고요. 현관문 여는 게 두려웠어요. 언제나 달려왔던 정이의 환영이 보여 단단히 누르고 있었던 슬픔이 떼를 지어 몰려왔거든요. 토막잠을 자다 깨면 밤과 낮, 시간까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쓸쓸하고 씁쓸한 여운을 남기는 꿈을 자주 꾸기도 했고요.


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밤, 한 번도 꿈에 나타나지 않았던 죽은 남편이 나타났습니다. 자꾸 손을 내미는 그에게 잡히지 않으려 무거운 몸으로 용을 쓰다가 잠을 깼는데, 온몸이 땀에 흥건히 젖었고 두려움에 벌벌 떨렸습니다. 분명 남편이 자기를 데려가려 나타난 것 같은 공포감에 숨까지 차올랐어요. 집 모퉁이 가까이 남편 오토바이 소리만 들리면 벌벌 떨리며 숨이 차오르던 오래전 증상이 나타난 거예요. 운자 씨는 그때처럼 뜨거운 물을 마시고 가슴을 슬어내리며 혼자서 꺼이꺼이 울었습니다. 다음날 밤에도 공포감은 살아났고 울다가 새벽녘에 겨우 잠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남편 갈 때 약속한 5년이 딱 올해인 거예요! 이 일을 어떡하나… 운자씨는 참담한 마음 이를 때 없었습니다. 이렇게 가는 건가….


다음날은 뜻밖에 오래전에 죽은 운자씨 엄마까지 꿈에 나타났습니다. 느닷없이 부추를 삶아 먹으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지네요. 잠에서 깨자마자 운자씨는 노구를 이끌고 장독대 너머 텃밭으로 어기적거리며 갔어요. 이제 막 올라오는 보랏빛 초벌 부추를 거문거문 베고, 옆에서 또 막 올라오는 연초록 방아잎을 함께 데쳐 나물을 대충 무쳤습니다. 손이 떨려 조물조물하기가 힘듭니다. 밥솥을 뒤집어 오래된 밥을 꺼내고 새 쌀도 안쳤습니다. 칙칙 거리는 소리에 밥 냄새가 구수하니 오래간만에 식욕이 조금 올라옵니다. 따뜻한 밥에 방아향 배인 부추 나물을 얹어 꾸역 한 숟갈 입에 넣었더니, 오랜만에 단맛이 살짝 돌았어요. 한 숟갈 두 숟갈... 모처럼 밥 같은 밥을 먹은 운자씨는 졸음이 쏟아져 그만 다시 스러지듯 잤습니다. 꿈같은 건 꾸지 않고 달게 잤습니다.


부추 나물로 겨우 기운을 얻은 운자 씨는 여름을 그럭저럭 보내고, 문득 들리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지나온 가을들을 생각했습니다. 콩 대도 두드리고 깻단도 쪄야 할 때구먼, 고구마도 살을 힘껏 올릴 때지. 이제는 수확할 작물이 없는 운자씨는 힘들어도 기쁨을 주었던 그 열매들의 감촉만이 아련할 뿐입니다. 그래도 아직 늦여름 텃밭은 운자씨의 갈무리 손길을 기다립니다. 간만에 나갔더니 땡볕에 하얀 봉우리를 머금었던 부추 꽃대가 그새 꽃을 활짝 피웠네요.

힘이 되었던 부추가 꽃을 피운 거라 운자씨는 더 반갑습니다. 하얀 부추꽃을 쪼글한 손으로 쓰다듬고 있는데, 해묵은 장독대 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텃밭으로 풀쩍 뛰어 운자씨 주변을 서성입니다. 야옹!

너도 혼자니?


배가 고픈 모양이로구나…쯧쯧. 그래, 오늘은 밥을 주겠다만, 자주 오지마. 정이 들면 곤란해….

야옹! 어디서 두마리 새끼까지 쪼로로 나왔습니다!






* 커버 이미지/ 안녕달 그림책 <메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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