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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Nov 23. 2021

생각하는 운자씨


가을걷이라곤 들깨밖에 떨지 않은 운자 씨는 깨알 한알한알 금가루처럼 모으고 얼르서 기름을 짜고 가루도 빻아놓았습니다. 이걸 당장 자식들 먹이고 싶어 조바심이 났지만, 막내딸에게 넌지시 한번 다녀가기를 비추었으니 반응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택배 부칠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위에 자식들은 어디가 그렇게들 아픈지, 아플 때도 되었지만...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 요즘은 부르기가 영 몰똑찮습니다. 어이쿠, 이래서 오래 살면 안 돼, 슬슬 자식 앞세울까 봐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언제나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이 떠오르고, 내년 된장과 장맛을 좋게 할 궁리가 자꾸 되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마지못해 오겠다던 막내딸은 소식이 없고 하루에 두 번씩 나타나는 길냥이 모녀만이 마당 이웃입니다. 그날도 고양이에게 점심때 먹고 남은 조기 뼈다귀를 던져주고 넘어가기 바쁜 해를 뒤로하며 현관문을 철커덕 닫고는 어기적 방으로 들어가 보일러 전원을 눌렀습니다. 외풍 있는 방에서 전기장판만으론  길어진 밤을 보내기 어려운 계절이 왔어요. 빨간불을 확인하고 침대처럼 늘 펴진 이불 위에 널브러져 챙겨 먹어야 할 귀찮은 저녁밥을 생각합니다. 우렁각시는 총각만 좋아하나, 이 늙은이한테도 한번 다녀갔으면 좋겠구먼, 따신 소고기 뭇국에 찰밥… 나갔다 오면 한상 차려ㅈ… 드르렁 드르릉 )))


갑자기 들리는 굉음(자기가 코 고는 소리)과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에 운자 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번쩍 떴어요. 사방에 깔린 짙은 어둠은 길 잃은 마음을 잠시 불러왔지만 곧 방안 가득한 냉랭한 공기에 몸을 반쯤 일으켜 보일러 버튼 쪽으로 엉금 기었습니다. 다시 껐다 켜보았지만 이상 없네요. 분명 빨간 불은 켜졌는데 왜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을까??? 이거 또 귀찮은 일 생긴 건가…. 운자씨는 이런 상황을 밝은 날까지 견디지 못합니다. 이미 바깥은 깜깜해졌지만 남은 기름 양도 확인할 겸 뒷곁 보일러실로 가기 위해 노구를 일으켰지요. 집안 곳곳은 눈감고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 불빛 없는 그곳을 전등도 없이 갈 수 있어요. 오래된 담벼락 감나무를 곁에 둔 보일러실은 점박이 주홍빛 단풍과 떨어져 박살이 난 홍시 잔해?로 입구 바닥이 불그스름 했지만  운자 씨는 앞만 보고 저벅저벅 뻑뻑한 문을 열기 위해 애쓸 뿐입니다. 열어보니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정말 들리지 않네요. 운자씨는 잠시 난감했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연결된 전기코드를 불쑥 뽑았다가 퍽! 꽂아 보았습니다. 웅~~~ 보일러가 돌아갑니다! 다시 뺐다 꽂으니 역시 돌아갑니다. 저벅저벅 어두운 모퉁이를 걸어 나와 따뜻해진 방에서 그날 밤도 자다 깨다를 반복 하며 잤습니다. 불행히도 우렁각시는 오지 않아, 멸균우유를 하나 따서 곡물가루를 넣고 휘저어 마시고는 말이죠.


다음 날, 이번엔 안방 문이 열리지 않네요. 방문을 닫고 나오자 안에서 잠겨져 버린 모양입니다. 오래된 아파트에 사는 딸 집에서 종종 그런 일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난감해진 운자 씨 또 생각했습니다. 이번엔 안방 창문이 생각났어요. 딸들이 자주 열어 환기를 시키라 했지만 귀찮고 오래된 창이라 열다가 고장이라도 날까 봐 늘 잠궈 두는데 혹시 열려 있을까, 열려 있으면 좋겠구먼, 생각해 본 적 없는 간절함이 솟았지요. 그리고 어기적 마당으로 나간 운자 씨의 눈은 레이다처럼 빙글빙글 돌며 무언가를 찾고 있어요. 옳지! 저거, 장독대 입구 빛바랜 빨간 플라스틱 의자 발견. 안방 창문 밑에 가져다 놓고 조심조심 후덜 거리는 다리로 올라섰지요. 투박한 손으로 방충망을 열고 창문을 오른쪽으로 밀어보니, 다행히 잠금장치가 풀려있어 열립니다. 도대체 누가??? 이번엔 먼저 올린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어 안간힘을 써 창틀에 올라앉았지요. 약간 어지러웠지만 이번엔 몸 방향을 바꾸어 창틀을 붙들고 살며시 방바닥으로 내려갔어요. 숨을 한번 몰아쉬고는 곧장 방치된 재봉틀 덮개를 걷어 실을 찾아서는 방문 손잡이 돌아가는 틈에 두어 번 돌려 묶었습니다. 다시는 저절로 돌아가 잠기지 않게 말이죠.



막내딸 은 언니들처럼 운자씨 먹을 고기도 과자도 사지 않고 두 손 가벼운 여행자처럼 나타났습니다. 근처에 내려주는 버스를 마다하고 ktx와 무궁화호를 섞어 타고서 제법 먼 거리인 역에 내려 걸어왔다고 하네요. 어릴 때부터 은근히 별난 구석이 있었던 영이 자주 말벗이 되어주니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밥 차려주고 함께 밥 먹을 수 있으니 말을 타고 와도 하늘에서 뚝 떨어져도 그저 반가울 것 같습니다. 영은 밭도 아닌 마당에 어지럽게 나있는 겨울초를 쑥 뽑아 국을 끓이고 나물도 무치고 파 송송 썰어 넣은 계란말이에 운자씨가 사다 놓은 조기까지 바삭하게 구워 늦은 점심상을 차려 내왔어요. 운자씨는 간만에 흡족한 밥을 먹고 보일러를 돌려놓고 누워서 이야기가 늘어집니다. 보일러가 끝내 고장 나 택시 기사가 사람을 불러 주었다는 둥, 안방 문이 잠겨 애를 먹었다는 둥, 뒷집 이 씨가 자기한테 삐진 것 같다는 둥, 그간 사정을 주저리주저리 꺼내며 마침내 이런 고백을 하고 말아요.


이제 밥해먹는 게 힘들어. 못하겠어….

뭐! 큰일이네, 그래서 올라가자고 했잖아. 겨울 동안만이라도 올라가 있자. 각 집에 십일 정도씩 머무르면 한겨울 넘길 것 같은데….

싫타! 멍하니 거기서 뭐하게. 감옥 같아… 힘들어도 여기 있는 게 나아.

근데 말이야, 아그들 유치원처럼 아침에 데려갔다가 저녁까지 먹여 집에 데려다주는 곳이 있대. 나도 그런 곳에 가면 좋겠어. 무슨 등급을 받아야 된다는데, 그걸 받을라고 정신이 없는 척하는 늙은이도 있다더라…. 나이도 이름도 몰라야 된대.

그래? 엄마도 그렇게 할 수 있겠어?

연극을 좋아하는 영은 직접 시연을 해 보였습니다.

말이야 더듬거릴 수 있지만 눈빛은 어떡하라고….

응? 눈빛?

그래, 눈빛은 못 쏙카.

맞네… 눈빛이 문제네.


다음날, 평상시와 다른 아침 분위기를 감지하며 영은 잠을 깼습니다. 세상 시끄러운 tv 소리에 새벽부터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날은 어째 주변이 조용하니 바깥 마루에서만 작은 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문을 열어보니 추운 마루에서 운자씨가 웅크리고 앉아 온풍기를 켜 놓고 tv 소리를 줄이고 오늘의 운세 화투패를 뜨고 있습니다.

추운 데서 뭐하는데?

니, 잠자리 바꾸면 잘 못 자잖아. 새벽에 잠들었을 건데 늦게까지 자라고.

어, 이제 그런 것도 신경 쓰나….



무궁화호만 서는 평일 시골역은 적막감이 돌 정도로 한산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승강장을 왔다갔다 하는 영 발자국 소리만이 가늘게 울립니다. 엄마가 갈수록 전두엽이 두터워지나, 눈빛도 알고 배려도 할 줄 알고. 한때는 고집이 너무 세어지고 괴팍해져 치매를 걱정했었거든요. 그러면 좋으련만, 뜨개질 이야기에 눈을 반짝거리던데 실을 좀 부쳐야지, 저 푸른 하늘처럼 운자씨 올 겨울이 맑음이었으면 좋겠다고 막내딸 영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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