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를 적어 보니

현실이었습니다

by 여름지이


시작은 동네 카페 은행나무 밑동에 올라온 어린 찔레나무였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싹을 틔운 것이 애틋하여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혼자 놀기> 매거진에 글을 하나 써 보았다. 발행하고 보니 마지막 문장 ‘ 같은 마음으로 이곳을 바라봤을 누군가의 눈길과 손길을 상상해 본다’가 계속 뇌리에 맴돌았다. 정말로 상상이 자꾸 일어났다. 일어나는 상상을 막을 길 없어 카페 주인 이야기를 지어내 보았다. 카페 주인을 만들어 놓고 보니 찔레나무를 눈여겨본 두 사람을 또 만나게 해주고 싶었다. 마침 걷는 길 큰고니 무리에 마음이 쏠려 있던 중이라 이들이라면 새를 좋아하는 마음도 닮지 않았을까 싶어 결국 함께 큰고니 일명 백조를 보러 가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했다. 그동안 3인칭 시점으로 썼던 글들은 내 경험에 양념처럼 약간의 장식을 가미했다면 이번에 쓴 3부작은 시작은 그러했으나 점점 가상의 인물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혼자 글을 쓰며 조금 많이 마음이 간질간질해진 새로운 경험이었다.


최근에 MBTI 검사를 해보니 infj라는 유형이 나왔다. 전체 인구 중 1.5%로 제일 적은 유형이라는데, 좀 멋쩍었지만 쭉 살펴보니 현재의 내 모습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 현재의 내 모습이라 한 건 예전엔 그렇지 않았던 부분이 환경과 상황으로 그렇게 변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르게 해석하면 원래 그런 사람인데 미처 발현될 기회가 없었다가 나이 들면서 나왔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결코 중심은 되기싫으나 변방에서 목소리 내는 것, 현실감각 없는 이상주의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이상주의자라 해서 대단한 이상을 품고 있는 건 아니고 단지 현재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 있어하는 부분이 그렇게 절실하지가 않다는 거다. 가장 쉬운 예로 돈을 벌면 얻는 것보다 잃을 것이 더 크게 다가와 경제활동을 은근히 터부시 하고, 좋아하는 일로 돈을 조금 벌 때는 돈을 받는 일이 미안해졌다. 언제나 보이지 않는 가치, 마음이 더 생각난다. 결혼과 육아로 한때는 조금 전환이 되는가 싶었지만 잎사귀가 빛을 따르듯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글을 쓰고 싶었고 글을 쓰니 더 현실과 멀어지는 느낌이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욱 살아나 내가 되어가고 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화되고 반대로 이상은 끊임없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 이 글귀를 좋아해 한 번씩 인용한다. 이번에 허구의 글을 쓰면 이 내용이 더욱 또렷하게 다가왔다. 분명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짓고 있는데 그곳엔 내가 읽고 듣고 경험한 일들이 줄줄이 엮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판타지 같은 이야기들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상황은 허구이나 어느 것 하나 허구인 건 없었다. 내 일상은 이상적인 모습으로 완성되었고 이야기 속 나는 또 현실에서 글감찾는 글고픈 사람처럼 일상을 가지런히 자세히 더 많이 보려 애쓴다.


판타지 공간이란, 현실에 갇히지 않으면서 현실의 복잡한 내면을 가장 잘 드러내는 비유의 공간이다. 목숨의 숨겨진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은유의 공간이다. 이래서 판타지 동화는 절대로 현실에서 먼 문학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현실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참여문학이라 할 수 있다. 희망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판타지 동화 세계> 중

글을 발행하고 보이지않는 누군가와 소통하는 브런치 생활은 나에게 판타지 공간이다. 현실이 꿈이 되어 나오지만 그 꿈을 꾸기 위해 난 현실을 결코 만만하게 대충 살지 않으려 늘 깨어있길 소망 한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infj 유형이 네트워크에 능하지 않아도 늘 분주하고 외롭지 않은 이유다. 때때로 강변 산책길에 스쳐 지나갔을 인숙씨와 순영을 만나게 해주었기에 난 오늘도 충만한 기분으로 혼자 걸으며 지나가는 모든 생명들에게 마음으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언젠가는 제 글속으로 초대하겠습니다!

소박한 꿈을 꿀 수 있는 소박한 현실에 감사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허술한 내 판타지 공간에 들러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소수의 독자님들께 무한한 감사 인사를 드린다.

겨울이 깊어 갑니다.

매우 크리스마스요 ^♤^ !








* 판타지 동화 세계/ 이 재복/ 사계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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