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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반 위의 사람

by 여름지이

꽁꽁 언 강물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얼음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이 귀한 세상도 아닌데 무슨 얘긴가 싶겠지만 먹는 얼음이 아닌 겨울 놀이로서 말이다. 저 정도 두께라면 마음껏 얼음을 지칠 수 있는데 찾는 이 없는 얼어붙은 강은 고요하기만 하다.


근처 강물은 유속이 느린 곳만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다. 고맙게 찾아와 준 철새들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원래 있던 곳이 얼자 이 추운 날 바람을 가르며 이동하는 물닭, 쇠오리 떼를 보니 안쓰러웠다. 기온이 더 내려가 강 전체가 얼어 버린다면... 얘들은 어디로 가야 하나.


양수리 쪽으로 나가보니 거긴 덕소보다 훨씬 많이 얼어 있었다. 강물도, 연꽃이 피었던 작은 호수들도 모두 얼어 너른 얼음판이 곳곳에 생겼다. 그곳을 지나며 물색없이 얼음이 아깝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기억은 아이들이 와글와글 무릎을 꿇고 나무 스케이트를 타거나 신발 스케이트를 신고 춤추듯 살랑이는 누군가의 우아한 동작을 그렸다. 뮌헨의 도가, 여기 아이들이 안보이더니 글쎄 모두 스케이트장에 가 있더라니까, 애들 참 순수하게 놀더라, 추억을 불러오는 말에 새삼 얼음판이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랬지, 겨울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얼굴은 빨개지고 손은 터서 피가 나도록 놀았지.


이왕 나간 김에 양평까지 들어 갔다가 돌아오는데 아까 그 자리, 강물이 흘러들어 만들어진 호수에, 빙판이 된 호수 중간에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으로만 그렸던 일이 그새 눈앞에서 일어나다니, 어떤 사람이 정말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분명 검정 외투를 입은 젊은 남자가 혼자서 , 비록 우아한 동작은 아니었으나, 음이 소거된 파란 하늘 아래 너른 공간을 외롭고 자유롭게 얼음을 가르며 겨울 속을 달렸다. 신는 스케이트를 한번도 타본적 없지만 속도를 느끼며 차가운 공기랑 맞설때의 기분은 어렴풋이 다가왔다. 어디라도 닿을것 같은 무모함과 자유. 우린 관객이라도 된 듯 차를 천천히 몰며 스치는 시간을 늘였고 괜스레 부러운 마음을 이 동네 살려면 꼭 스케이트 하나쯤은 있어야겠어, 라는 말로 대신했다.


피겨스케이팅이 생겼을 정도로 얼음을 길들인 사람의 몸짓은 예술이 된다. 음악과 함께 돌고 미끄러지며 은반 위에서 추는 춤은 누군가의 내밀한 세계가 은밀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스케이트장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어요. 페터와 페트라는 곧바로 작디작은 스케이트를 신고 얼음판으로 나갔어요. 둘은 얼음판 위에서 춤을 추고, 빙빙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고, 뒷걸음질을 치기도 했어요. 두 아이가 춤을 출 때 마치 희미한 빛이 둘을 감싸는 것 같았어요. 구나르는 멀리서 나지막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글쎄요, 그건 순전히 구나르의 상상이었는지도 몰라요. 구나르는 숨을 멈췄어요. 여태까지 그렇게 아름다은 모습은 본 적이 없었거든요.
- 동화 <페터와 페트라> 중 -







* 엄지소년 닐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창작과 비평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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