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 모은 빛깔들 3
이 경이로운 계절의 따스함, 태양, 즐거움, 향기를 그냥 쓸데없이 흘려보낼 이유가 뭐람? 꽃이든 다른 것이든 무언가가 농축되어 손에 닿도록 매달려 있으면 우리가 그걸 따다가 춥고 고약한 계절에 위안을 얻으면 안 될 이유가 뭐야? - <헤르만 헤세의 나무들> 중 -
누구 잘못인지 모르겠다. 운자 씨 마당에 낯선 과일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자두나무를 심고 기다렸더니 속까지 검붉은 작은 열매가 열리고, 복분자라고 심었더니 저런 딸기가 열리더란다. 서양 자두 푸룬이고 서양 딸기 블랙베리라고 딸들은 거의 단정했다. 종묘상 주인이 알면서도 시골 노인한테 속여 판 것인지 외국 종묘회사의 전략으로 주인 자신도 모르고 묘목을 들인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두 번째 여름을 맞은 나무엔 열매가 주렁주렁 많이도 열렸다. 초여름에 늦은 연분홍 꽃과 붉게 변하는 모습만 보고 왔는데 여름이 익을수록 딸기도 검게 익어 덩달아 운자 씨 마음도 조급해졌다.
복분자가 많이 익었어! 어서 와서 따가!
아이 참, 복분자 아니라니까, 블랙베리!
뭐? 뭘 배렸다고?
아니, 배린 게 아니고 블랙베리라고. 복분자가 아니고 서양 딸기 종류야.
몰라! 맛은 없어도 때깔이 몸에 좋을 것 같어! 저 많은 걸 누가 다 먹어.
서양 그림책에서만 보던 **베리들이 자꾸 물 건너오더니 시골 고향집 마당에도 지천이 되어 버렸다. 조금 생경하기도 걸맞게 쨈을 만드는 풍경을 만들어 들어가고 싶기도 했지만, 저걸 따겠다고 천리길을 가야 하나...
마침 운자씨 성화에 못 이겨 내려간 언니들 편으로 아이스박스에 시커먼 냉동된 물건이 배달되었다. 옛다! 니가 쨈 만들겠다니 다해라! 예상대로 무지 시고 씨가 뼈다귀 수준, 생으로 먹기는 불가능이라 정말 쨈을 만드는 수밖에는 없었다. 헤세의 글귀를 꼽씹으며 게으름을 합리화한다. 춥고 고약한 계절에 위안을 얻으면 안 될 이유가 뭐야? 겨울에 만들자!
동짓달 긴긴밤에 팥죽은 안 쑤고 쨈을 조렸다. 씨를 걸러 내는 게 중요해 고운 채에 삶은 베리를 받쳐 끈끈한 과육만 내리는데, 이렇게 힘들 줄이야. 한밤중 부엌이 온데 검붉은 색으로 칠갑이 되니 거의 반은 포기하고 겨우 내려온 것만 조렸다.
몇 번 경험으로 설탕을 넣고 과하게 졸이면 뽑기 맛이 난다는 걸 알게 되어 조금 묽다 싶을 정도에서 불을 껐다. 식으니 오히려 향이 살아있으면서 점도가 괜찮았다.
열매에 담겨온 경이로운 계절의 따스함, 태양이 _____ 즐거움, 향기 그리고 따스함을 다시 부른다.
* 헤세의 나무들/ 창비/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