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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Feb 13. 2022

하가다, 이야기하다

피플 오브 더 북/ 제럴딘 브룩스


책도 인연이 있어 만나야 될 책은 다가온다. 언젠가 이야기 한 <도서관의 말들>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으로 꼭 읽고 싶었지만 또 잊고 살았다.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모임에서 지난달은 오스트레일리아, 알고 보니 호주 작가 책이었다. 소장하고픈 욕구가 일어 한 권 주문했더니 무려 2009년 발행된 오래된 초판이 왔다. 세월을 품은 예사롭지 않은 금박 무늬 표지는 펼쳐질 이야기의 전주곡 같아 살짝 설렜다.  

기대했던 만큼 독특한 소재와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에 압도되는 소설이었다. 장대한 스케일과 전문적인 용어, 시공간을 넘나드는 구성으로 읽기가 매끄럽지만은 않았으나 음미하고픈 섬세한 디테일은 페이지를 자주 되돌렸다.



하가다, 사라예보 하가다

하가다는

히브리어 ‘흐그드- 이야기하다’가 어원으로 유대인 가정에 한 권씩 있는 중요하고 흔한 책이다.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대 민족의 대축제인 유월절의 의미와 기도문을 적어 놓은 조그마한 히브리어 경전으로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 저녁식사 '세데르' 예식에 사용된다.

이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 보스니아 사라예보에 있다는 ‘사라예보 하가다’는

그런 하가다 중 하나로 14세기 스페인에서 제작된 매우 오래된 필사본이다.

1894년 가난한 유대인 가족이 팔려고 내놓았다가 세간에 알려졌다.

이 하가다가 특별한 이유는 묵직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교도 사서들에 의해 구출되어 오백여 년의 세월 동안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중세 유대인 성서에 따라 어떠한 형상도 그리거나 만들면 안 되는 시대를 역행한, 보기 드문 아름답고 화려한 채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은 독특한 사례로 19세기 학계에 소개되자 미술사 교과서 내용이 바뀔 정도였다고 한다.


작가 제럴딘 브룩스와 해나

시드니에서 태어난 제럴딘 브룩스는 월 스트리트 저널 특파원으로 보스니아 전쟁(1992~ 1995)을 취재하러 갔다가 특별한 하가다의 존재를 알게 된다. 폭격으로 불탔던 보스니아 도서관의 최대 보물인 <사라예보 하가다 >, 행방을 알 수 없었던 이 경전은 종전 후 무슬림 사서에 의해 구출된 게 알려졌는데, 2차 대전 중에도 나치로부터 역시 이슬람 학자에 의해 구해진 사실이 있었다. 그녀는 이 역사적인 구출 이야기와 화려한 채식이 있는 성서 그림에 깊은 영감을 받아 사실과 사실 사이를 상상으로 메워 밀도 있는 팩션 소설을 완성했다.


소설 속 화자 해나는 작가의 분신처럼 호주 출신으로 유능한 서적 보존 전문가다. 정부와 유엔은 내전으로 폐허가 된 보스니아에 다시 나타난 ‘사라예보 하가다’를 복원을 목적으로 해나를 불렀지만 그녀는 생각이 달랐다.

화학약품을 사용해 뭔가를 지우거나 대대적으로 복원하라고 절 고용한 건 아닙니다. 저는 그런 식의 접근에 반대하는 논문을 많이 썼어요. 그런 식으로 책을 만든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것은 역사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죠. 책은 지난 세대가 건네준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어느 정도는 손상되고 닳은 모습이 그 역사를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기에 제 일은, 책을 안전하게 취급하고 연구하기에 충분할 정도로만 손을 보고 절대 필요할 때만 수선하는 것이에요. p32

보존 과정에서 발견한 상상의 조각들과 현실의 해나 이야기는 하가다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역사가 짧고 문화의 불모지라고 외부에서 평가하는 신대륙 다민족 국가인 호주의 여성이 중심을 담당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보존되면서 사라예보 하가다가 전해 줄 분열이 아닌 인류의 화합, 공존, 사랑이라는 메시지와 무관하지 않다.


상상을 불러온 조각들

해나가 책을 유심히 관찰하며 발견한 세월의 흔적은 이런 것들이다. 가까운 과거에서 먼 과거 순으로 보면


곤충의 날개,

 

깃털과 장미 한 송이,


와인 자국,

 

소금물,


하얀 털.


여백에는 한 권의 책이 500년이라는 세월을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남는 여정이 담길 것이다.

2차 대전 영향권의 사라예보, 1894년 퇴폐와 향락의 빈, 1609년 종교재판의 광기가 서린 베네치아, 유대인 추방령과 함께 공존의 시대가 막을 내린 1492년 스페인 타라고나, 그리고 콘비벤시아(14세기 중반경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시대) 끝무렵 1480년의 세비야, 각기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하가다가 퍼즐 조각처럼 나타날 때마다 그것의 도도한 흐름이 느껴졌다. 더불어 서적 보존 전문가, 도서관 관장, 사서, 필경사, 제본사, 화가 등 책이 단순한 텍스트가 아닌 물성으로 존재하는데 기여한 이들이 빛나는 조연이 되어 그곳에 있었다.


상상이 만들어낸 모래 한 알

서적보존 전문가 해나의 일은 겉으로는 웬만한 지적 능력과 기술을 요하는 숙련된 솜씨가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었다. 연구 결과에 상상력을 더하면 그 책을 만든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져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작업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의 지식이라는 모래 상자에 모래 한 알을 보태는 행위가 된다고.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과학에서조차 상상력은 한계를 넘는 중요한 요소다. 걸음마 단계였던 유전학 분야를 발전시킨 여성과학자 바바라 매클린톡도 이런 말을 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나의 일부가 되지요. 그러면 나 자신은 잊어버려요. 그래요, 그게 중요해요. 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거 말이에요. 거기에는 더 이상 내가 없어요. -<생명의 느낌> 중-

하가다의 채식 가운데 샤프란색 옷을 입고 세데르 식탁에 앉아 있는 검은 피부 여인, 작가는 이 여인 속으로 들어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1480년, 세비아의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 무슬림 화가 소녀는 우여곡절 끝에 안착하게 된 유대인 가정에서 그들의 벙어리 아들을 위해 그림이 들어간 친절한 기도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예의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샤프란색 옷을 입고 유대인 가족과 식사자리에 앉을 정도로 이교도에 대한 벽은 허물어져 있었다.


 하가다는 말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장대한 스케일의 이 책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분명하다. 소박한 유대인 기도서 하나가 종교재판, 학살, 추방, 전쟁 등 오랜 세월 다른 종교와 갈등을 겪어면서도 여전히 이슬람의 나라에서 보존되는 것은 종교가 분열이 아닌 인류의 화합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화합이 도달하지 못할 이상이 아니라는 건 한때 건재했던 ‘콘비벤시아’ 시절이 말해 준다. 반전이 있었던 인물 보스니아 도서관장 오즈렌의 말은 또 어떤가.

그것이 여기 온 건,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게 우리를 갈라놓는 것보다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있는지 보기 위해서예요. 유대인이나 무슬림, 가톨릭이나 정교회 교도라는 사실보다, 인간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이에요. - p472




종교가 없는 내게 종교와 책에 관한 이 소설이 흥미로웠던 건, 오래전 '이승에서 교회에 가장 가까운 곳은 서점'이라는 어느 소설의 구절을 지금도 기억하기 때문이다. 책읽기는 안개로 뒤덮였던 인생길에 희미한 빛으로 나타나 점점 밝은 곳으로 인도해 주었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며 생활을 일으키고 궁극적으로 삶을 가꾸는 글쓰기로 나아가려 한다. 읽는 책들이 경전은 아니지만 소소한 삶을 지향하는 이에게도 종교적인 삶에 다가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시작이 분열이 아니라 사람들을 통합하려 생겨난 가상의 실재인 종교도 경전이라는 물성의 책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런 면에서 하가다, 사라예보 하가다는 종교의 본래 의미를 가장 잘 실천한 문화유산이다.




*피플 오브 더 북/ 제럴딘 브룩스/ 이나경 옮김/ 문학동네, 2009

*생명의 느낌/ 이블린 폭스 켈러/ 김재희 옮김/ 양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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