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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Sep 23. 2021

별은 빛났으나

오정희 소설 <새>


이틀 후면 다시 먼곳으로 떠날 도(아들)가 여전히 관계에 질척이는 모습을 보니 불안감이 스멀 올라온다. 오정희 소설책 <새>를 잡았다. 그녀의 다른 소설 한 구절이 소개된 글귀를 본 순간, 집에 있는 <새>가 떠올랐던 것이다. 도가 청소년 시절 독서 모임에서 읽은 책인데, 웬만한 건 함께 읽었는데, 이 책은 선뜻 손에 잡히지 않았고, 이사를 다니면서도 어쩐지 처분 대상에서 항상 제외되는 운명을 이어갔다. 시집처럼 얇고 좁은 책. 오늘 아침나절 난 이 작은 소설책을 읽고 충격까진 아니지만 묻어두었던 자격지심, 자괴감에 시달린다. 이 책을 읽고 리뷰나 독후감 숙제가 나온다면 난 쓸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아닌 글을 이렇게 쓰고 있다.


열두 살 불쌍하고 불행한 소녀의 주변 사람들과 세상은 익숙하고 낯설다. 익숙한 건 영화나 다른 소설 그리고 실제로 뉴스로 접한 현실이라 그렇고, 낯선 건 경험하지 못한 세계라 그럴 것이다. 언젠가 함께하던 공부모임에서 한 분이 떠나며 가진 책들을 우리들에게 한 권씩 선물했다. 책을 누군가에게 전할 땐 받을 사람을 생각할것이다. 나에겐 1세대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최민식의  <종이거울 속의 슬픈 얼굴>이라는 사진 산문집이 주어졌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칭송하며 건넸는데, 그때도 지금처럼 자괴감 비슷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살짝 억울했다. 어항 속 세상이 모든 것인 양 살랑살랑 헤엄쳐 다니는 해맑은 금붕어처럼 보인 것일까. 넌 잘 모를 거야. 여기 다른 세상도 있다고 은근슬쩍 알려주기용 같았다. 뒤늦게 맛들인 독서도 세상을 배울수록 늘 주변에 빚진 마음을 들게 했다. 머무르는 환경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쉬운 언어로 동물행동학의 역사와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  <떡갈나무 바라보기>에서 동물이 경험하는 주변 생물 세계를 ‘움벨트’라는 새로운 용어로 정의했다. ‘세계’, ‘경험’, ‘자연’ 또는 ‘현실’ 같은 용어로는 동물이 경험하고 인식하는 세계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어 만든 용어인데, 모든 동물이 공유하는 경험이 아니라 특정 동물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유기적 경험을 말한다. 벌과 개미의 세계는 서로 겹치지 않는다. 들판이라는 동일한 환경을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움벨트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도 움벨트가 존재하는 것일까. 끈끈한 공동체 의식으로 무장하여 서로를 지극히 도우기도 하지만 각자 성벽을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이 쌓아 철저히 움벨트 세계를 구축하니 말이다. 춥고 배고픈 성냥팔이 소녀가 바라보는 창문 너머 따뜻한 가정들, 서로 겹칠 수 없는 세계이다. 소설에서 ‘상담 어머니’란 여인이 나온다. 어쩌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또 어쩌다 고립되고 숨죽여 살아야 되고 그래서 구원을 갈구하는 비슷한 처지의 어른들에 둘러싸여버린 소녀에게 그 어른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유일하게 소녀를 도우려는 인물은 상담 어머니란 이름으로 학교에 봉사하러 오는 학부모다. 결손가정 학생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용기를 주려한다. "왜 집은 알려주고 그랬어?" "엄마 아빠 없는 불쌍한 언니란다." 일기 검사를 빌미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상담어머니를 느닷없이 찾아간 날, 현관문을 닫고 나오는 소녀 뒷자락에 꽂힌 수군거림이다. 깨끗한 승강기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고 침을 뱉는 소녀. 처음부터 의미없었던 상담어머니한테마저 절망감이 몰려온다는 건, 영원히 겹칠 수 없는 세계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상담어머니는 죄가 없다. 세상의 상담어머니들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이웃을 돌아보고 불쌍한 언니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그럼에도 세상은 상담어머니는 상담어머니고 불쌍한 언니는 불쌍한 언니일 뿐이다. 성냥팔이 소녀도, 우주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되라고 우미라고 이름 짓고 우주에서 제일 멋진 남자가 되라고 우일이라 이름 지어진 불쌍한 남매도 그들만의 세계에서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서서히 꺼져간다. 과거로부터 온 소식인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한번 생겨난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며 그 이름들을 부르던 마음이 목소리가 되어 들려오지만, 꿈조차 꿀 수 없었던 그들이 살았던 세상엔 공허함만 가득하다.


상담어머니도 되지 못하고 불안감을 잠재우기위해 나이 들수록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탐닉하는 독서들도 공허하긴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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