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제바르, <프랑스어의 실종>/을유문화사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알제리 편으로 읽은 책이다.
프랑스는
알제리를 식민지(132년이나 지배)라기보다 그냥 확장된 영토로 여겼다고 한다. 마르세유에서 알제까지의 거리가 마르세유에서 파리의 거리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알제리 '독립전쟁'(1954~ 1962)이라는 표현마저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요즘은 그때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사과하지만 아직도 지배 사실과 알제리 전쟁 자체에 대한 공식 사과는 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오늘날, 알제리에서보다 우리에게 더 유명할 수도 있는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다. 피에 누아르라는 단어는 알제리에 살며 프랑스령 알제리를 고향으로 간주하는 프랑스인, 혹은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으로 카뮈가 여기에 해당된다. 반대로 알제리 베르베르인이면서 프랑스에서 수학하고 프랑스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사람도 있다. 만약 우리 일제 식민지 36년 역사도 100년 더 늘어났다면 일본어는 지금 생활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알제리 독립 전쟁에서부터 1993년 내전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 베르칸과 주변 사람들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 화자와 시점이 수시로 바뀌면서 베르칸이 쓴 짧은 소설까지, 소설 속 소설로 이야기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몰입이 잘 되진 않았지만, 이 글을 쓰며 좀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마그레브 지역의 한 나라인 생소한 알제리를 느낄 수 있었고 비슷한 과정을 겪었던 약소국들의 고난의 역사, 우리 식민지 역사까지 떠올리게 한다.
이슬람의 프랑수아즈 사강으로 불리는 작가 아시아 제바르(1936~ 2015)는 생전에 매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뛰어난 알제리 출신의 여성작가이다. 자전적 소설에 가까울 수 있겠는데 식민지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의 언어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프랑스에서 공부한 이 아랍 여성 작가에게 모국어와 프랑스어라는 이중언어의 세계가 프랑스로 이민 갔다가 20년 만에 귀향한 소설 속 주인공 베르칸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도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다.
내 젊은 시절의 추억을 글로 쓰면서 프랑스어가 내 기억을 되살리는 언어가 되고 있어…
베르칸의 언어로 상징되는 두 여인, 프랑스 애인인 배우 마리즈, 고향으로 돌아와 짧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알제리 여인 나지아. 사랑을 나눌 때 아랍어로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나지아로 인해 지지부진했던 글쓰기가 마침내 풀리지만 베르칸은 귀향 후 쓴 글들을 남기고 실종된다. 독립 이후 알제리의 정치적 상황을 생각하면 베르칸의 실종을 프랑스어의 실종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정부가 아랍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지식인들을 탄압하고 국민들은 분열된다.
암살 사건이 증가했고, 거의 모든 사건이 법적 처벌을 받았다. 베르칸과 그의 소리 없는 실종은 은연중이긴 하지만 이러한 혼란, 이러한 광기 한가운데에서도 중심에 자리하는 듯했다. 은둔자인 그 사람이! p237
정신은 모국어가 있어야 살아나지만 글쓰기에는 프랑스어가 필요했던 것일까. 자신의 두 언어가 필요했던 베르칸. 작가 아시아 제바르도 1962년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알제대학에서 프랑스어가 아닌 아랍어로 교육을 강요하자 거부하고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고 한다. 이 땅에서 자유롭게 한 개의 언어로 읽고 쓰고 말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중 언어가 주는 특별한 느낌이 궁금하다.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우리말과 글을 지켜야 했던 우리 앞 세대 경우랑, 오롯이 한 인간의 존재방식으로서 표현의 도구인 언어의 의미는 달랐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 민족주의자들도 대의를 위해 무고한 시민을 암살한다. 알제리 여인 나지아의 할아버지는 오랑의 담배상이었는데 자금줄 역할을 하다가 그들을 충족 못 시키니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래저래 전쟁 속에서는 어느 편이든 무고한 시민들만 피해자일 뿐이다.
“내 조국은 어디야? 내 땅은 어디에 있어? 내가 잠잘 수 있는 땅은 어디에 있지? 나는 알제리에서 이방인이고 프랑스를 꿈꿔. 프랑스에서는 더욱더 이방인이고 알제를 꿈꾸지. 조국이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인가?” 배우인 마리즈가 연기한 피에 누아르 여성, 마틸드는 또 이렇게 절규했다!
알베르 카뮈는 알제리 자치권은 확대하되 독립을 반대한 회색분자로 낙인찍혀 알제리 독립 후 그의 모든 흔적이 그곳에서 지워졌다 한다. 노벨문학상 기념비에 카뮈의 이름이 끌로 지워진 채 방치되었을 정도라니 문학으로 알고 있던 알제리와 카뮈 관계의 반전이다. 그럼에도 카뮈 문학은 영원히 누군가에게 알제리를 꿈꾸게 할 것이다. 봄철 신들이 내려와 산다는 티파사의 여름은 또 어떨까.
나는 두 눈을 활짝 열고 본다. 바다 위에는 정오의 엄청난 침묵, 아름다운 존재들은 저마다 제 아름다움에 대한 타고난 긍지를 지니고 있다. 세계는 오늘 온 사방으로 저의 긍지를 스며나게 한다. 이런 세계 안에서 무엇 때문에 내가 삶의 기쁨을 부정하겠는가? 그렇다고 삶의 기쁨 속에만 온통 빠져 있을 것도 아닌 바에는, 행복해진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정오가 조금 못 되어 우리는 폐허를 지나 바닷가의 조그만 카페로 돌아온다. 태양의 징소리와 온갖 색채로 쩌르렁쩌르릉 울리는 머리에는 그늘이 짙게 들인 홀과 얼음같이 차가운 초록빛 박하냉차 한 잔의 환영이란 얼마나 신선한 영접인가!
- 카뮈 산문집 <결혼. 여름>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