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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Mar 22. 2022

먼 나라에서 하룻밤

들꽃 아이/ 임길택


새 학년 새 학기는 언제나 들뜨기 마련이지만 중학생이 된 봄날에 비할까.

사춘기와 봄날은 닮아 있었다. 낮의 긴장감과 소란스러움은 공기처럼 느낄 수 없었지만 봄밤은 그때도 쌀쌀했다.


한 반의 끝 번호가 61, 62까지 있을 정도로 시골 골짜기골짜기 넘쳐났던 아이들은 중학교를 위해 면소재지에 모였다. 면소재지 초등학교를 나온 내게 골짜기, 그러니까 ‘산중’이라 불렀던 그곳 아이들은 조금 달라 보였다. 눈빛이 잘 변했고 기운이 쎄 보이고 행동이 거침없었다. 거기다 시간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다. 농협 연쇄점 앞 정류소에 우르르 몰려 버스를 기다리는 그들 앞을 지날 때면 그동안 친구들한테서 느껴보지 못한 낯선 무언가가 흘러나와 나에게 당도했다.


도시에서만 살아오던 김 선생님은 면소재지 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오일장이 서고 대장간 구경을 할 수 있고 물레방아가 도는 한가한 마을입니다. 김 선생님은 처음부터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어요. 중학교를 가기 위해 시험을 치는 시대라 바짝 긴장하며 정신없이 새 학기를 보내고 있는데, 한날 교탁에 꽃병 가득 진달래가 환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보선’이라는 아이가 꺾어왔다는 걸 다른 아이에게서 듣게 되어요. 신학기라 학생들 이름을 익히고 있는 중이었만 김 선생님은 보선이란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지요. 지각이 잦아 자주 생활기록부를 들추게 하는 학생이었고, 그날도 어디에 갔는지 자리에 없었습니다. 생활기록부에는, 공부는 뒤떨어지나 정직하고 맡은 일을 열심히 함,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보선이의 꽃 봉사는 봄이 무러 익을수록 더 풍성해져 김 선생님이 들꽃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됩니다. 어려서부터 우등생으로 살아왔지만  아이들이 물어오는 꽃 이름을 몰라 답답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식물도감을 사서, 보고 익히며 보선이가 꺾어온 꽃으로 반 아이들과 자연스레 꽃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화단에 있는 외국 꽃들보다 은은한 우리 들꽃들이 훨씬 아름답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고요. 그런 중에도 보선이는 여름이 되도록 여전히 지각을 하고 오후에는 일찍 하교를 하고 싶어 안절부절, 장날엔 장심부름으로 오후 수업에 늦어 김 선생님을 화나게 했습니다. 거기다 보선이가 벌써 손전등을 가지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선생님은 가정방문을 한번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서먹했던 분위기가 풀리기 시작하던 3월 말쯤, ‘미자’라는 산중 친구가 면소재지 우리들에게 뜻밖의 제의를 했다. 동네 어떤 어른이 우리들을 초대했다며 밤새워 이야기도 하고 함께 놀자는 것이다. 낯선 산동네에서 친구들이랑 밤새워 논다고? 호기심과 망설임이 교차했지만 우린 중학생이 되었고 말로만 듣던 그런 걸 할 수 있는 나이라고 온갖 봄기운은 꼬드기고 있었다. 마침내 부모님한테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지 토요일 오후 몇몇 친구들과 산중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향하던 곳을 상상하며 바라보기만 했던 그 버스를.


여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토요일 오후,

보선이에게 방문 허락을 받은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따릿골’이라는 보선이 동네로 출발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그대로 멈춰 버린 듯한 고즈넉한 산골 풍광에 잠시 감상에 젖기도 했지만 곧 자전거를 끌고 갈 수 없는 길에까지 접어들게 되어요. 숲 속에서 만난 많은 들꽃들은 보선이가 꺾어온 꽃들이라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교실을 향기와 흰빛으로 은은하게 해 주었던 함박꽃도 벼랑 끝 도라지꽃도 보선이 얼굴처럼 반가워 혼자 걷는 길에 좋은 동무가 되어 주었지요.


그런데, 가도 가도 마을은 안 나타나고 긴긴 여름 해도 기울어져 버립니다. 산속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자 당황한 선생님은 무서운 마음까지 들었어요. 이토록 먼길을 다니는 보선이와 손전등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고요. 그런 보선이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힘이 솟아 무서움도 사라지고 어슴푸레 안개에 덮인 숲과 밤하늘이 다정하게 다가왔습니다. 마침내 산등성이를 두 개째 넘자 먼 골짜기 희미한 불빛이 보였고, 선생님은 뛰는 가슴으로 무조건 빛을 향해 어둠 속을 내달렸어요. 하얀 메밀밭을 가로지르고 가시덤불, 웅덩이를 뛰어넘고.


버스 속에서 무슨 얘길 하고 가는 길은 어떠했는지 기억에 없다. 어디에 내려 주었는지도 모르겠고, 다만 나무가 우거지고 개울이 흐르는 길을 두리번거리며 걸었다는 것, 그리고 다음 장면은 미자네 안방 기다란 상에 차려진 저녁 밥상이다. 부모님은 안 계셨고 미자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엌으로 들어가 순식간에 저녁을 준비했다. 안방과 부엌이 연결된 작은 문을 연신 들락거리며 반찬을 내왔다. 상황에 놀랐고 속도에 놀랐다! 그때까지 해주는 밥만 먹었던 따라간 우리들은 친구가 차려준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된장을 풀어 끓인 토장국을 한 숟갈 뜨는데 댓잎이 하나 나왔다. 조금 찝찝했지만 몰래 치우고 그냥 먹었다.


선생님이 보선이네 집에 다다랐을 땐 열 시가 이미 넘어 있었습니다. 합해봐야 다섯 집뿐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선생님을 늦도록 기다리고 있었어요. 30년 전 학교가 생긴 이래 마을을 찾아준 선생님은 김 선생님 뿐이라고, 감자떡, 메밀묵, 옥수수술 같은 귀한 음식들을 들고서 말이죠


저녁을 먹고 우리를 초대했다는 마을 어른 집으로 갔다. 어른은 젊은 남자였다…. 황당했지만 다행히 그 오빠는 젠틀했고 이야기와 놀이로 괜찮은 시간을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또래 남자아이들도 왔던 것 같은데 생각나는 일이 없다. 밤을 새우진 않아 쌀쌀한 밤길을 걸어 미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선생님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는 열두 시가 훨씬 넘어서 였습니다. 마당 앞을 흐르는 물소리에, 열린 방문 너머로 보이는 북두칠성과 카시오페이아 별빛에, 자꾸만 머나먼 나라에 와 있는 것 같아 쉬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온 사방이 깜깜했고 내 호흡과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가 기울여졌다. 어떤 소리였는지는 생각나지 않아도 나를 감싸던 느낌은 지금도 선명하다.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같은 면面에 있는 산골인데도 밀려오는 아득함으로 주변은 어둠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맘때쯤  꺼내보는  동화 <들꽃 아이> 에 사춘기 시절 추억을 엮어 보았다. 김 선생님과 나는 다른 상황으로 산속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그날 밤이 선물한 마음의 이미지는 닮아있다.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어린 시절 시골에서의 추억이 임길택 선생의 동화를 읽으면서 마치 이름을 부른 것처럼 의미가 생기고 살아났다. 임길택 선생(1952~ 1997)은 강원도 정선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주로 탄광 마을, 산골 마을에서 오랫동안 아이들의 소박하고 순수한 모습을 꾸밈없는 맑은 영혼의 글로 담아냈다. 다른 이야기 속 많은 아이들처럼 보선이도 실제 인물이며 선생님이 만난 아이다. 보선이가 걸었던 길을 많이 잃어버린 세상이 안타까워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 선생님도 나도 후일담이 있다.

산중에서 하룻밤을 자고 정확히 일주일 후, 토요일에 학교로 편지가 왔다. 놀랍게도 미자네 그 동네 오빠가 보낸 것이었다. 안부 인사와 함께 향기 나는 껌종이에 시가 곱게 적혀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함께 갔던 친구들에게 넌지시 고백했다. 그런데, 그런데, 다 받았더라…. 도대체 그 오빠의 정체는? 왜 우리를 그곳으로 불러들였으며 모두에게 한 편지질은 또 뭐며, 또 놀러 오라 했지만 우린 가지 않았다. 무료한 산골 생활을 그런 식으로 풀고 있는 정말 할 일 없는, 좋게 말하자면 문청(문학청년)이었나???


김 선생님은 이듬해 3월에 군대를 가야 했다. 졸업식날 보선이에게 주려고 <안네의 일기>를 준비했지만 안타깝게도 전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겨울방학이 지나도 계속 내리는 눈으로 보선이는 결석 상태였고 졸업식날도 끝내 학교에 올 수 없었다. 옆반 선생님에게 책을 맡긴 김 선생님은 창문 너머 그칠 줄 모르는 눈만 바라볼 뿐이다.




자연도 사람도 순수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이와 어른은 삶이라는 웅덩이에 같이 발을 담그고 있었다. 우리에게 '과거’는 '기억'이라는 것이 있어 존재한다. 그리고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었다. 나좋을대로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갓 중학생이 된 사춘기 소녀가 들어갔던 산중에서의 하룻밤은 순간이 영원처럼 기억되어 추억으로 남았다.






* 들꽃아이/ 임길택/ 길벗 어린이,2010

*산골마을 아이들/ 임길택 동화집/ 창비,2004

*들꽃아이는 동화집에 들어있는 단편이 그림책으로 나온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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