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미호, <나의 작은 헌책방>
학교 졸업을 앞두고 직장이나 취업보다 막연히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은 회사원이나 교사, 공무원 같은 직업이 아닌 조금 다른 무엇이라 생각했다. 막연한 생각은 구체화되지 못했고, 시간이 한참 지나 중년으로 접어들며 비슷한 일을 잠깐 경험했다.
어린이 독서 지도사 공부를 하고 책방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시를 함께 낭송하고 옛이야기를 입말로 들려주기도 긴 동화를 읽어주기도 했다.
글쓰기 지도보다 읽어주는 시간이 더 좋았다. 들리는 이야기에 점점 빠져드는 아이들의 눈빛을 느끼며 책을 소리 내어 읽는 그 시간은 나에게도 성독이 되었다. 내 목소리와 나는 어느새 분리되어 아이들과 함께 듣고 있는 것이다. 몰입의 여운은 집 가는 길에도 따라와 구름 위를 걷는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 책의 저자 다나카 씨는 스물한 살 이른 나이에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았다. 오래도록 꿈꾸고 준비한 일은 아니었어도 헌책방을 덜컥 하게 된 것이다. 있을 곳을 갖고 싶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어서,라고 했지만 하필 왜 헌책방이었을까. 다나카 씨는 또 이른 나이에 자신을 제법 알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주변머리가 없고 계산도 잘 못하고 소통 능력도 별로 없어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었습니다. 숫자와 경쟁은 제가 가장 못 하는 두 분야. 책을 좋아해 이미 많은 책을 갖고 있었던 그녀는 혼자서 자신의 속도로 할 수 있는 헌책방을 열었던 것이다. 근로기준법을 완전 무시하는 직장을 10개월 만에 그만두고, 돈 쓸 시간이 없어 그대로 모인 10개월치 월급만을 가지고서. 고서적상 조합 가입비가 없어 조합에도 못 들고 가진 책과 팔러 온 사람들 책만으로 장사를 시작한 그녀지만 마음은 이랬다. ‘이걸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뭘 할 수 있을까?’ 실험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작은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독립 책방 세계를 조금 겪어보아 아는데 여기는 늘 운영이 어렵다. 유지할 정도가 되면 성공한 경우이며 주인장의 철학이 단단하지 않으면 그만둘 이유는 수두룩 하다. 다나카 씨의 헌책방 ‘무시 분코(벌레 문고)’ 가 시작된 30여 년 전 일본도 다르지 않아 아직도 이 헌책방이 건재하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아직도 하고 있네! 같은 말은 책방이 망하지 않는 한 주인이 계속 듣게 될 것이다. 훅 불면 넘어갈 것 같았던 영세한 헌책방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마 주인장 다나카 씨의 특이한 다른 이력 때문인지 모른다. 스스로를 바다 조수 웅덩이에 붙어사는 말미잘의 고착 생활에 비유할 정도로 책방 좁은 계산대를 떠나지 않는 일상이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드넓은 우주,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이끼 연구와 거북이 관찰이 그것이다.
살고 있는 지역 오카야마 이끼 연구 모임 회원으로 초보자를 위한 이끼 관련 책도 여러 권 냈다. 숲 속을 느리게 걸으며 몸을 낮추어 자세히 보아야 하는 이끼를 관찰하고 벌레 문고로 가져와 현미경으로 진짜 이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은 그녀 자신의 몸 크기나 무게 같은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경이롭고 기분 좋은 일이라 했다. 이끼 연구가가 하는 헌책방이라… 관련 책도 풍부할 것이며 점점 그곳만의 특색이 되어 입소문이 나고 알려진다. 뭔가를 하고 있다는 자신의 발견은 일을 확장할 수 있는 추진력이 된다. 열 평도 안 되는 좁은 가게 안에서 전시회, 라이브 공연 등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시도한다. 숫자와 경쟁 앞에선 열등헀을지라도 스스로 생각하고 궁리하며 실천하는 일에는 우수했던 다나카 씨.
오랫동안 한 장소를 지키는 헌책방 역사에 주인장 이야기만 있으랴. 평범한 이웃에서부터 유명인, 또 무엇보다 secone hand book 인 헌책, 그리고 고양이들 까지, 다나카 씨가 들려준 벌레문고 이야기는 또 다른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세계였다.
이끼는 몇억 년 전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온 첫 번째 식물이면서 아직도 여전한 흔한 식물이다. 진화의 큰 흐름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단순화시켜 독자적인 새로운 생활환경을 만든 이끼의 생태는 크고 힘센 것만 살아남는 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런 면에서 헌책, 헌책방, 헌책방을 운영하는 다나카 씨의 삶도 세상의 주류에서 벗어났으나 여전히 건재하며, 어쩌면 세상의 속도가 가속화될수록 더욱 쉼터가 되어 미래로 이어지게 되는, 그래서 이끼를 닮았다.
공교롭게도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이 아닌 다른 길을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랑 다나카 씨가 자영업을 시작한 때가 거의 같은 무렵이다. 그때 이미 일본은 저성장 시대에 돌입하여 젊은이들이 소확행, 워라벨을 추구하며 작지만 소소한 만족감을 주는 일들을 하던 시기다. 다나카 씨가 쉽게 헌책방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아마 그런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90년대 초 한국 젊은이에겐 취직을 꼭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롤 모델은 주변에 없었다.
한 세대가 지나니 그런 세상이 왔다. 주변에 젊은 주인의 취향이 담뿍 묻어난 카페나 빵집, 책방 그리고 대를 이어하는 가게들이 점점 생겨나고 있다. 다양한 지역, 장소, 일들에서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이 자라나길 바라며, 도시에서 자랐지만 독립을 선언하며 시골에서의 삶을 선택한 한 젊은이(나의 둘째 아들)에게도 응원을 보낸다.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는 구라시키 시, jr 구라시키 역 남쪽 출구를 나와 상가따라 걸으면 ‘미관지구’라는 관광지가 나온다. 전주 한옥마을처럼 구라시키 미관지구라 불린다는데, 그 동네 처마가 낮은 오래된 거리를 똑바로 걷다 보면 한적한 곳에 하얀색 삼베로 만든 포렴(가게 출입문에 간판처럼 길게 늘여 놓은 베의 조각)이 보일 것이다. 다나카 씨가 운영하는 무시 분코, 충문고蟲文庫, 우리말로 해석하면 벌레문고(주인장 성격처럼 썰렁하고 단순한 나름의 의미가 있더라)의 포렴이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를 소개하는 여러 영상 중에서 유일하게 찾은 벌레문고 모습이다. 일본 여행을 다시 가게 된다면 오사카역에서 기차를 타고 저곳에 가보고 싶다. 책을 들고서.
안녕하십니까, 다나카 미호 씨!
*민트색은 책 문장 그대로 인용
*나의 작은 책방/ 다나카 미호 저, 김영배 옮김/ 허클베리북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