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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l 17. 2024

계절 따라 살기


아침 산책이 시작된 게 5월부터였던 것 같다. 안방이 아닌 내 방을 갖게 되면서 생긴 변화다. 나의 방으로 정한 곳이 동쪽으로 창이 나 있어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일찍 환해지고 있었다. 무려 새벽 5시부터 말이다.

이 시간에 잠을 깼다고 산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어느 날엔 벌떡 일어나 아침들을 만나러 가는 사건이 한번 발생했고, 그때 만난 아침들의 차분함이 너무 좋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침을 아침들이라고 명사화 한건 아놀드 로벨의 동화 <집에 있는 부엉이>, 눈물차편에서 부엉이 말을 가져온 것이다. (이름은 들어봤나) 눈물차라는 걸 마시는 황당하지만 사랑스러운 부엉이가 눈물을 모으기 위해 생각한 슬픈 일들 중 한 가지에 이런 게 들어 있다. 모두들 잠을 자는 바람에 아무도 보지 않는 아침들. 이 문구에서 아침이란 자고 있거나 홀라당 빠르게 지나가는 그저 그런 하루 중 한때가 아니라 사실은 놓치기 아까운 시간처럼 다가온다. sns에서 넘치는 멋진 사진들 중 여명보다 노을 사진이 많다는 게 누구나의 일상이 아침들을 놓친 증거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암튼 아침이 아침들로 구체화된 순간이다.


발견에 가까운 이른 아침 산책은 하지 무렵이 절정이었다. 새벽공기라고 하기엔 너무 밝고 환했지만 산산함은 잃지 않았다. 마치 다가올 장마와 폭염에 지지 않을 신이 내려앉은 것처럼 온 누리가 맑고 시원했다.

걷다가 의자만 보면 꼭 앉는다. 앉으면 풀숲 사이의 강, *떠드렁섬의 야생, 아파트공사를 한다고 허물어지고 있는 야산 같은 것이 풍경이 된다. 그리고 까만 실선으로 보이는 개미들의 행렬, 물고기들이 만드는 물파동, 새끼 고양이의 주검, 말라버린 지렁이들의 수북한 잔해, 이름 모르는 새의 노래, 온 데를 감기 시작하는 덩굴식물들의 위용, 나무에 새겨진 지의류들 그리고 요즘 제철을 만난 야생 버섯들 까지, 풍경 사이사이 작은 생명들의 삶과 죽음은 고요하고도 요란했다.

버섯 계단
윗줄 왼편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우산버섯, 작은 유사석버섯, 흰독큰갓버섯, 가지버섯, 오렌지껍질(이 아님)곰팡이, 애기낙엽버섯 으로 추정됨

해가 일찍 떠서 일찍 눈을 뜨게 되었고, 눈 뜨면 몰려오는 온갖 생각들, 과거와 미래가 뒤엉켜 지금을 불안하게 하는 생각들을 털어버리고자 산책을 가거나 텃밭으로 향했다. 그런데 잡생각이 아닐지라도 그래야만 했다. 계절이 그러하여 낮의 열기에 맞서 무엇을 할 재간은 없다. 몸을 쓰는 일도 이 계절을 누리는 일도 일찍 시작되는 낮에 기대어야만 한다. 농경사회는 분명 그러했을 것인데, 다른 생태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사계절의 아침은 반복되는 시간일 뿐이다.

하지가 지난 지 거의 한 달, 그사이 새벽 5시의 밝기에도 조금 변화가 생겼지만 이 계절이 영원할 것처럼 계속 아침 산책을 나올 거라는 의지의 말을 툭 내뱉다 다시 고쳐 생각한다. 이 여름이 끝나갈 쯤이면 아침 산책이 심드렁해지거나 늦어질지도 모른다고. 그럼 또 계절 따라 알맞은 시간을 찾겠지.

시간이 진정으로 지금 이 순간만 남으니 무엇하나 기대할 필요가 없다. 희망이 없는 대신 실망도 없다. 열광이 없는 대신 무료함도 없다. -사노요코 <두 개의 여름> 중-


우리의 삶에도 계절이 있다. 지금 나의 계절은 어디쯤 일까. 잎을 떨구기 시작하는 나무의 계절은 아닌지, 내 방으로 돌아오면서 계절이 바뀐 건 확실하다. 문을 걸어 잠그는 소녀처럼 감정이 롤러코스트를 타기도 하지만 허술하기 그지없는 방문으로라도 잠시 자발적 고립을 선택하면 씩씩대는 내 모습이 보이고 부끄러워진다. 대부분 책만 들면 졸리지만 방해받지 않고 언제든 안경(돋보기)을 찾아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볼 수 있는 건 작으나 더없는 자유다. 작은 방에서 누린 자유는 바깥으로 나갔을 때 누구나에게 다정해지고 싶어 진다.

열광이 없는 사람에게 계절의 변화마저 없다면 얼마나 지루하고 무료한 인생일까.

또 다른 계절을 생각한다. 징검다리 계절인 봄, 가을을 지나면 반드시 오고야 마는 여름과 겨울을 닮은.. 삶과 죽음, 이 두 계절의 수레바퀴에서 우리의 영혼은 떠돈다. 다른 쪽으로의 시간 두려워하지 말아야지.






*떠드렁섬- 떠내려온 섬. 지역마다 물이 있는 곳에 있는 작은 섬. 고향마을에는 동동 떠내려온 냇가의 똥 같다고 ‘똥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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