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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Nov 21. 2024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정신적이기 위해 감각적인

나의 11월 손님

         -로버트 프로스트


나의 슬픔은, 그녀가 여기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을비 내리는 이 음울한 날들이

더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네.

그녀는 벌거벗은, 메마른 나무를 사랑하네.

그녀는 비에 젖은 목장길을 거니네.


그녀의 기쁨은 나를 머물게 하지 않을 것이네.

그녀는 이야기하고 나는 기꺼이 들어주네.

그녀는 새들이 떠난 걸 기뻐하네.

그녀는 자신의 소박한 잿빛 털실 옷이

안개가 맺혀 은빛으로 변한 걸 기뻐하네.


쓸쓸한, 버려진 나무들

빛바랜 대지, 무거운 하늘

그녀가 진정으로 보는 아름다움들

그녀는 내가 그것들을 보는 눈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이유가 뭐냐고 성가시게 물어대네.


내가 눈 내리기 전

벌거벗은 11월의 날들의 사랑스러움을

알게 된 건 어제의 일이 아니라네.

하지만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헛된 일

11월은 그녀의 찬양에 더 잘 맞는다네.


메리 올리버의 산문집 <휘파람 부는 사람들>을 뒤적이다 프로스트의 시를 발견했다. 지난여름 몹시도 습하고 더웠던 날, 가을에 써먹을 일이 있을까 싶어 슬며시 옮겨 보았다. 강풍이 초미풍보다 못한 고장난 선풍기 바람이 산산한 가을바람으로 변해가던 필사의 시간. 늦가을에 대한 찬미보다 순진한 ‘그녀’에 대한 ‘나’의 고급진 사랑 노래 같아 화사한 봄바람까지 일렁이었더랬다.


마침내 샛노래진 은행나무가 어둠 속에서 가로등이 되는 계절이 지나가고 있다. 11월이 되었건만 나의 11월 손님이 어째 빛을 잃은 듯하다. 시 속을 거닐지 않아도 눈앞이 충분하니까. 대신 자신의 산문집에 로버트 프로스트 시의 세계를 밀도 있게 이야기한 메리 올리버가 새로이 들어온다. 글 쓰는 이들 사이에 자주 언급되는 자연주의 시인 메리 올리버를 이제야 만난 듯하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잃어버린 영혼이 돌아오는 걸 느낀다, 고 찬사한 김숨 소설가의 표지 글이 아닐지라도 다시 꺼내어 본 그녀의 산문집에는 세상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고 빛나는 영혼들로 가득이다. 그런데, 늦은 나이에 산문집을 내기 시작했는지 서문에 뜻밖에 이런 말이 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 시대 이 나라의 독자, 가벼운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 열렬한 독서가 할 것 없이 모두에게 유독 강하게 나타나는 작가 개인을 향한 호기심을 피하고 나 자신에 대해 아주 적게 말하는 걸 현명하고 고상한 일로 여겨왔다. 그런 나의 생각은 조금 달라졌다. 이제 나는 젊은 작가도 중년 작가도 아니고, 그다음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책을 내기 시작한 지도 어언 35년이 흘렀고 글을 쓴 세월은 그보다도 길다 보니 어느덧 독자들이 내 실제 삶에 대한 작지만 끈질긴 관심을 갖게 된 듯하다.

그래서 메리 올리버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추측성이 아닌 참작할 만한 실마리를 제공하기 위해 사적이고 자연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며 갈등하고 그럼에도 발행하는 일을 번복하며 자주 정처 없어지는데, 시인의 이야기는 조금 위로가 되었다. 글을 쓰는, 글을 쓰고 싶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주저하면서 쓰고야만다는 터무니없는 동질감에. 독서와 사색에 한계가 있어 쓸 것이 그것밖에 없다는 내 슬픈 현실이 우리 사이를 구분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1935년 출생, 63년부터 시집을 내기 시작하였으며 94년에야 첫 산문집이 나왔고 이 책 <휘파람을 부는 사람>은 99년도 출간이다. 특별한 이야기, 이를테면 직업적 삶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소중한 비밀 같은 걸 기대하는 대신 그저 대화의 한 토막, 길고 천천히 도착하는 편지쯤으로 생각해 달라는 이 산문집에는 단편소설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당신이 추앙하는 앞 시대 시인들을 깊이 있게 언급한다. 무엇보다 시인의 산문집부터 먼저 읽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시 몇 편이 소개되어 있는데, 시집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산문집은 성공한 셈이다. 잘 알지 못했던 시인의 세계가 아래 시 한 편에서 움터 들어왔다.


                          이끼

                                   

어쩌면 세상이 평평하다는 생각은 부족적 기억이나 원형적 기억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된 것—여우의 기억, 벌레의 기억, 이끼의 기억인지도 몰라.


모든 평평한 것을 가로질러 도약하거나 기거나 잔뿌리 하나하나를 움츠려 나아가던 기억.


지구가 둥글다는 걸 깨닫는 데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현상—직립—이 필요했지.


이 얼마나 야만적인 종족인가! 여우와 기린, 흑멧돼지는 물론이고. 이것들, 작은 끈 같은 몸들, 풀잎 같고 꽃 같은 몸들! 코드그래스, 크리스마스펀, 병정이끼! 그리고 여기 작은 흙더미 위를, 발톱과 무릎과 눈으로 뛰어다니는 메뚜기도 있지.


나는 가을에 장작더미에서 검은 귀뚜라미를 보면, 겁을 안 주지. 그리고 바위를 좀먹는 이끼를 보면, 다정하게 어루만져.


사랑스러운 사촌.


시를 쓸 때 복종적이고 순종적이라는, 자존심과 허영심 심지어 의도까지 내려놓을 수 있어 그저 받아 적는 재능을 갖고 싶다는 시인에게 숲은 신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눈앞에 펼쳐진 자연이 맹목적인 사랑의 대상이었다. 하여 세상을 구분 짓지 않는다. 시의 시작은 인간세계가 아닌…주목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시작하고 끝난다 했다. 인간과 인간 외 혹은 생물과 무생물로 나누는 것에서 소중한 것은 탄생하지 않았다. 산책길 식물의 뿌리나 꽃잎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면 마치 투시력이 생긴 듯 그것을 상징적인 존재로 볼 뿐이다. 이건 어떤 종교나 사상이 아닌 눈만 뜨면 나가는 산책의 일이었다. 나무들 아래를, 창백한 모래언덕을 걸으며 만나는 환희일 뿐이었다.

내가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어느 순간 나를 쿡 찌르는 손길이다. 컴퍼스풀이 주름진 가지를 구부려 차가운 모래밭에 완벽한 원을 그릴 때나 가을에 노란 말벌이 내 손목에 내려앉았다가 꿀 묻은 접시로 옮겨 갈 때, 내 몸을 관통하는 감사의 불길이다. (…) 나는 사실적이고 유용한 것보다는, 기발하고 구체적이고 함축적인 걸 좋아한다. 나는 걷는다. 그리고 주의 깊게 살핀다. 나는 정신적이기 위해 감각적이다. 나는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고 모든 걸 들여다본다.
그렇다고 꼭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정신성은 신학적인 것이 아니라 자세다. 그러한 관심은 사실을 담은 최고의 책보다도 더 나를 살찌운다. 지금 내 마음 속에서는 입증된 사실들과 입증되진 않았지만 강렬한 직관들이 겨루면 사실들이 진다. (...)나는 바람, 떡갈나무, 떡갈나무 잎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대신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산책에서 돌아오면 어땠냐고 언제나 물어오는 동반자 M이 있었다. 마치 프로스트의 시 <나의 11월 손님>에서 11월의 사랑스러움을 알게 된 게 오래전 일이지만 그녀가 그것을 찬양하는 것이 더 잘 맞는다고 말하는 ‘나’와 같은 존재. 30년을 함께 살았음에도 휘파람 소리 하나에 낯설고 다시 사랑스러워지는, <휘파람 부는 사람> 속 그녀일지 모르는.


메리 올리버가 걸으며 자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던 곳은 미국 북동부 프로빈스타운 이라는 작은 항구도시다. 그곳은 케이프코드(cape cod)라는 (포항 호미곶같은)에 속한 동네로 지도를 보면 대서양을 향해 낚시 바늘 모양으로 뻗어있다. cod(생선 대구)가 들어간 의 이름이 말해주듯 대구가 많이 잡히는 지역인가 보다. 잡초 우거진 모래언덕을 걸어 내려오다 해변으로 떠밀려 온 싱싱한 대구를 발견하면 집으로 가져간다니, 요리하고 남은 부산물은 양동이에 담아 갈매기들을 위해 다시 해변 모래밭에 쏟아 놓는다니, 시인이 발 디뎠던 그곳은 작은 세계이자 거역할수 없는 흐름의 장소였다. 잘 떠나지 않았다는 그곳에서 길어올린 시는 바람에 몸을 맡긴 돛단배처럼 세상을 유영한다. 대양을 따라 처음이 끝이 될때까지.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는 연못물이다. p44





*휘파람 부는 사람/ 메리 올라버, 민승남 옮김/ 마음산책,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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