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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ug 24. 2024

풀과의 전쟁

맞더이다

영도에서 부산 바다를 굽어보며 노닥거릴때, 전화가 들어왔다. 텃밭 관리인 아저씨다. 142번이 풀밭이다, 이럴 거면 다른 사람한테 넘겨라, 어떡할 거예요? 포기하라는 말? 무슨 말씀, 우리는 휴가 중이고요 곧 정리하러 가겠습니다, 로 무마했지만, 설마 했던 올 것이 왔다는 자책감에 마음 한편이 꾀름직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아, 공공텃밭의 비애여..


텃밭er 누구나 그렇듯 장마 전까지는 부지런히 가꾸며 환희에 차지만 이어지는 장마와 폭염에 텃밭 가는 횟수는 점점 줄고, 마침내 발길을 끊는 집들이(풀의 밀도로 짐작하여)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하나 둘에 해당되고 싶은 마음은 꿈에도 없었으나 폭염이 길어지는 바람에, 아침산책에 빠지는 바람에, 아니다 사실은 작년에 해봐서 관심과 열정이 식어서,라고 얄팍한 원인분석을 해본다.

그런데 이 아저씨 너무 업무에 충실한 거 아닌가. 어련히 더위 누그러지면 안 찾아갈까 봐. 그렇다고 아예 발길을 끊은 것은 아니라 간간히 손길 흔적을 남겨놓았었는데, 그사이 텃밭에 무슨 일이 있어 포기 모양새가 되었을까. 마음은 7월 말부터 쪽파씨랑 서울배추 씨앗을 사놓고 언제나 파종하려나 손꼽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단정하고 찬란했던 지난날

일상으로 복귀하고도 바로 텃밭에 달려갈 수 없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거기다 더욱 달구어진 대기의 열기는 밤낮이 없어 자전거로 가야 하는 텃밭행을 도울 기미가 없었다. 이러다 정말 포기하는 밭으로 낙인찍힐 것 같은 위기감은 점점 짙어지고.. 마침내 해 질 무렵 텃밭에 당도한 날, 우리는 적잖이 놀랐다. 2년 차 텃밭러로서 이렇게 무성하고 장대한 풀들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가보지 않은 것도 처음이니까.


괭이와 쇠스랑 모양의 기구를 각각 들고 둘이서 풀매기에 돌입했다. 온몸이 쪄지는듯 무겁게 땀은 흘러도 일은 진도가 안 나갔다. 바짝 마른땅의 풀들은 더욱 흙을 움켜쥐고 있나. 먼지만 풀풀 날리고 고역이었다. 티끌 하나 없는 바로 옆 연변녀 밭을 물끄러미 본다. 그녀 본 지도 오래되었군. 풀은 비 온 다음날 매면 좋아요. 언젠가 먼지 날리며 호미로 풀을 쪼고있을 때 지나가던 그녀가 슬쩍 흘린 말. 그때는 수시로 풀을 뽑았기에 아무려면 어때 싶었는데, 이제야 현실로 다가온다. 겨우 두 고랑 매고 이건 아니다 싶어 철수했다. 밭을 보고 오니 더 심란하고 조바심이 났다.


고맙게도 연이틀 비가 내렸고, 어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는 처서날, 태풍 종다리가 아무리 습기를 더 몰고 와도 아침 느낌이 달랐다. 늦은 오후가 되자 해가 먹구름에 가려지고 소나기가 쏟아질 태세다. 이때다! 누구 기다릴 것도 없이 혼자서 풀매기에 최적의 시간이 딱 온 것 같아 자전거로 내달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비가 내려도 비를 맞아도 좋을 것이다. 무더위에 비하랴.


백만 년을 기다려 *풀들의 전략에 맞서는 용사가 된 듯 풀밭으로 뛰어들었다. 무기는 호미, 그러나 곧 필요 없어진다. 땅이 촉촉하니 오히려 손으로 뽑는 게 쉽다. 바랭이 방동사니 쇠비름, 지팡이로 가는 명아주 나무? 까지 쑥쑥. 손이 지나갈 때마다 속살 같은 포슬한 땅이 나타나니 일에 가속도가 붙는다. 눈아 걱정 마라 손이 다 해 줄게, 통영 출신 어느 노파의 딸(동서)이 전해준 말이 맞더라. 소나기가 한차례 다녀갔으나 방해가 아니라 찬조였다. 아, 시원하고 상쾌하다.

그리고 나타난 뜻밖의 열매,  풀섶을 헤치다 맞닥뜨린 이 정체불명의 열매들, 나는 심지 않았다!

세 덩이나 발견

무늬는 수박이나 질감이 다르고, 무엇보다 잎이 수박이 아니다. 어쩌다 혼자서 몰래 자라 버린 수박도 호박도 아닌 이것은 무엇일까. 뿌리 쪽을 더듬어 찾아가 보니.. 연변녀가 심어 준 개구리참외가 있던 곳이다. 호의는 감사했지만 열매는 안 열리고 넝쿨만 기세등등하여 슬쩍 거둬냈었는데, 한 포기가 일을 냈구먼. 안 온 사이에.. 고춧대를 타고.. 세 덩이씩이나! 무성한 풀이 그늘막이 되어 폭염으로부터 보호를 해줬겠지. 감사한 일이다. 그녀에게, 그녀에게 인사할 수 있게 해 준 개구리참외에게. 스스로 자란 이것은 분명 모양이 다르다.


두 번에 걸쳐 풀을 정리하고 주변을 정돈하고 나니 비로소 가을 농사 계획이 선다. 8월 날씨만큼 어수선하고 괴로웠던 텃밭을 향한 마음들, 처서가 지나고 새로이 열리는 땅에 기대어 다시 시작이다. 농사는 습관이다는 말을 겨우 다섯 평을 돌보며 상기하다니. 아침나절이면 밥상은 내몰라라고 땀범벅이 되어 노구를 콩밭에 파묻는 한 노파가 증인이다.

주인 안오는 밭을 지킨 작물들





*<풀들의 전략>은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책 제목,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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