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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Oct 21. 2024

산돌 키우기

한승원 자서전 <산돌 키우기> 중, 다시쓰기


밭이 한 뙤기도 없는 기호네 형 기철은

뒷산 정씨 문중 산지기 노릇을 하고 있었어.

대신에 편편한 잔등의 땅을 얻었지.

부지런한 기철형은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개간을 하는 거야.

소나무, 철쭉, 진달래, 노간주나무 따위를 곡괭이, 괭이, 삽, 톱으로 치고 자르고 파고.

나오는 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굴려다가 밭둑을 만들고.


기호랑 산에서 나무를 해오다 형을 만났어.

아이고, 요 꼬맹이들 내가 선물 하나 주지.

쑥내민 손에는

차돌처럼 생긴 돌이 있었어.

자라는 돌, 산돌 이랬어.

기호의 돌은 주먹 둘을 합친 크기만큼인 내 것의 두 배였지만.. 그래도 괜찮아.

내 돌이 말이야,

한쪽 모서리가 개 이빨처럼 쭈뼛쭈뼛

그 밑은 연한 자주색의 석영인데

끝부분이 희고 투명한 것이 무지갯빛까지 감도는 거야.

찐보라, 연보라, 남색, 자주색..아, 몰라몰라.


기철형이 산돌 키우는 법도 가르쳐줬지.

그늘진 땅속에 묻어놓고 쌀이나 보리 씻은 뜨물을 날마다 한 번씩 부어 줘야 해.

절대로 파보아서는 안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

산돌 키우는 사람은,

남의 못자리에 돌을 던진다거나

남의 집 감을 따먹는다거나

남의 수수모가지를 자른다거나

누구를 때린다거나

뱀이나 개구리를 잡아 죽이면 안 돼.

대신,

거지가 오면 후하게 곡식을 퍼주고

맛있는 것은 동무하고 나눠 먹고

책도 돌려 보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고

싸우지 말고

양보하고...

그래야 그 돌이 쑥쑥 잘 자란단다.


그 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벌써 석영이 죽순처럼 자라 찐보라 유리 기둥이 담 위로 솟아올랐어.

쌀뜨물을 두 차례나 준 날,

산돌은 더 자라

석영 기둥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고.

물론 모두 상상이야.

아직은 마당 가장자리 담 그늘 아래 묻은,

밥 짓는 작은 누님이 준 뜨물 반 바가지를 매일 받아먹는 산돌.


닷새 지나고

기호, 자기 손가락 한마디를 가리키며

내 돌은 이만큼 자랐는디, 니 돌은 얼마나 컸냐?

나는 아직 안 파봤다..

열흘 지나고

기호, 온 손가락을 내보이며

이만큼 자랐는데 니 돌은 얼마나 컸냐?

내 돌은 쬐금밖에 안 자랐어.(거짓말)

내가 심술을 부렸을까

거지한테 함부로 했을까

거짓말은 했네.. .


누구한테나 잘 웃어주고

어른들 심부름을 잘하고

누님에게 받은 뜨물을 잘금잘금 부어주었지.


그런데

왜 내 돌은 자라지 않을까?


니 돌은 얼마나 자랐냐?

이만큼 자랐어!

어디 보여줘 보여줘!

절대로 안 돼. 나는 그것을 어두컴컴한 데다 숨겨놨어.

.

.

.

.

.




기호도 나도, 사실은 산돌 키우기에 실패했지.

아이들은 누구든지 산돌을 키우다가 실패를 맛본다는 사실.

모두 거짓말을 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어른이 되어 있더라고.

속절없이 자라지 않는 돌을 슬퍼하면서도 뜨물을 계속 부어주는 아이가 자란 어른.


내 나이 벌써 85이야.

지금도 내 뜨락에 산돌 하나를 묻어  키우고 있어.

내가 저 세상으로 떠난 다음에 보라색 자색의 유리 기둥처럼 자랄지 모르잖아.

보이는 것만 꿈꾸는 건 아니잖아.





*커버이미지/ <은하철도의 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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