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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Jun 15. 2020

빈집 연가(戀歌)

<건축 탐구, 집>이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주택과 골목이 있는 동네를 좋아해 그런 곳에 가면 어슬렁거리며 남의 집 기웃거리는 게 취미다. 어쩌다 조그만 마당이 있는 집에 7년 정도 살아보기도 했다. 그 시절 누군가 우리 집 마당을 기웃거리면 언제든지 문을 활짝 열어 거리낌 없이 들어오게 했다. 기웃거리는 내 마음이 기웃거리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건축 탐구, 집>은 남의 집이 궁금한 우리들에게 마음껏 집 구경을 시켜주는 굉장한 프로그램이다. 그것도 다양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영혼의 집들을.


집은 물질화된 영혼이라는 말이 있다. 선택이 아닌 환경이 되어버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집과 동네는 투자의 수단, 부의 척도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가치, 집에 대한 철학을 갖고 그 속에서 삶의 무늬를 그려나가는 사람들을 만나면 더운 여름날 어디선가 불어오는 한줄기 산들바람을 맞을 때처럼 마음이 살짝 뜬다.


이 프로그램이 구경시켜준 집 중, 가장 인상적이고 여운이 남은 집은 민병헌이라는 사진작가가 살고 있는 100년의 시간이 쌓인 군산 적산가옥이다. 마음속에 꿈꾸던 집을 때가 되어 공들여 지은 집도 아니고 길가다 우연히 발견한 12년이나 방치되었던 빈집이 왜 그토록 한 사람에게 열망이 되었을까. 언젠가부터 빈집을 보면(그것도 허물어져가는) 마구마구 집을 치우고 고쳐 짜잔~ 우물과 찔레꽃이 만발하는 집으로 탄생시키는 상상이 또한 취미인 me는 짚히는 구석이 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그 집이 한눈에 들어왔고 흉가나 다름없었던 내부를 보고 더 살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니.


일제강점기 식민지 수탈의 근거지였던 군산에 남아있는 적산가옥, 당시 고위 관료가 살았던 일본식 양옥집 형태지만 100년의 세월을 거치며 시공간이 뒤섞인 독특한 건축양식이 흥미롭다. 현관, 창문은 그 당시 일본이 추구하던 서양식에 일본식 골마루와 다다미방, 별채는 1960년대 우리 빨간 벽돌집이다. 곳곳에 세 문화가 섞인 짬뽕(집주인의 표현) 같은 집이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아 집주인은 그 점이 미치도록 좋았다고 한다. 최대한 그 모습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최소한의 수리를 하고 들어왔는데 마루 샹데리아, 커튼이 그대로라니 다른 건 말해서 무엇하랴. 씻고 쓸고 닦고 고치고... 허물어져가던 집도 사람 온기 가득한 손길로  어루만지니, (우리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죽은 사람도 살려 내었던 뼈살이꽃, 살살이꽃, 피살이 꽃, 숨살이 꽃, 혼살이 꽃을 얹은 듯 기지개를 켜며 살아나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리모델링한 여느 집처럼 세련되고 깔끔하진 않지만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오늘을 살고 있는 수수한 모습이, 예술가로서 자기만의 길을 천천히 가고 있는 집주인을 꼭 닮아 있었다.

너른 집에 혼자 살고 있으나 왠지 집주인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집과 사람 사이에 도도히 흐르는 시간이 서로를 지켜 주는 듯 평화롭고 따뜻했다.

우리들 사이에 가로놓인 공간은 마치 시간인 듯했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말이다. 시간은 우리들 앞으로 똑바로 달리면서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둥그런 고리처럼 우리들과 평행으로 함께 달리는 듯하다. 그러면 시간의 차이는 없어지고,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모두 한데 포개지게 된다. - 윌리엄 포크너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中 -


빈집이 살아나는 이야기에 매료되는 건 <숨어 있는 집>이라는 그림책의 여운을 여전히 갖고 있어서일 게다.

한때는 나무인형을 만드는 할아버지 집이었지만 세월이 흘러 흘러 숲 속에 묻히게 되고, 어느 날 어느 가족에게 발견된다. 조금 세월이 흐른 후, 결국 그 가족이 다시 찾아와(민병헌 사진작가처럼) 집과 나무인형들에게 숨결을 불어넣는다.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와 담백한 그림은 빈집을 살아있는 생명체로 느끼게 해 주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새 주인을 찾지 못하고,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은 빈집도 있다.

고향집 건너편에 언제나 있는 집이다. 처녀의 몸으로 나이 든 남자의 재취로 온 수반 댁 아주머니. 들은 이야기고,  내 기억엔 아이가 없는 과부로 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 여인이 다른 세상에 가면서 남겨논 집이다. 홀로 남겨진 시간만큼 덤불과 나무에 점령당해 스러져가고 큰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좁다란 길마저 사라져 버렸다. 갈 때마다 눈길이 머문다. 집도 집이지만 노인들만 사는 시골마을의 운명이 저 모습이려나 싶어서.


이맘때쯤 주인 없는 집 담벼락 야생 장미는 내 어릴 때나 지금이나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수반 댁이 수십 년 전 농사지어 내다 팔 던 부추도 여전히 뿌리로 이야기하며 귀뚜라미 소리 벗 삼을 음이면 부추꽃을 또 내놓는다.

작년 봄과 가을


정말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모두 한데 포개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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