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ess bu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영 Jun 16. 2020

나를 붙잡은 이슬아

이슬아 작가를 만난 건 구독하고 있는 신문 칼럼에서다.

7,80년대 아이 같은 얼굴 사진과 함께 지면 한쪽에 글이 연재되고 있었는데 특이해서 눈길은 갔지만 선뜻 읽어지진 않았다. 몇 번 넘기다, '일간 이슬아 발행인'이라는 문구에 조금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글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글인데도 글(?)이 낯설어 짧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그 시간에 갇혔다고 해야 하나.

어딘가에 납작 엎드려 있다가 붕~ 위로 올라간 기분, 소름이 돋을 듯 말 듯, 잠깐 다른 세계를 엿본듯한,  암튼 그랬다. 색다르고 신선했다.


안테나가 이 독특한 작가한테 주파수가 맞춰지며 들어오는 정보들에 마음을 실어보니, 글과 그녀의 삶이 연결되었다. 연재 노동자로 어떤 플랫폼으로부터 청탁을 받아야만 독자를 만날 수 있었던 이 무명작가는 SNS로 스스로 독자를 모집해 메일로 글을 배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한 달 구독료 만원, 일주일에 다섯 편이니 한편에 오백 원인 셈이다. 10원을 받아도 돈을 받으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데, 공장에서 나오는 물건도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글을 직거래하다니... 의아스럽고 걱정되었지만 용기에 박수가 쳐졌다. 그렇게 나온 시리즈가 <일간 이슬아> , 대박이 났다!. 그 글들을 묶은 책이, 이슬아 에세이집도 아닌 <이슬아 수필집> 이다. 엄마와 함께하는 가내 출판사인 '헤엄 출판사'에서 발행했단다. 왜 헤엄 출판사인지 수필집을 보면 짐작이 간다.


수필집을 읽으면 그녀의 첫 글을 읽었을 때 소름이 돋을 듯 말 듯하던 나의 감각이 이젠 쫙 일어나 완전 소름 돋는다. 무서워서가 아니고... 그냥 모든 감각이 터치당하는 기분이랄까. 매일매일 쓴 자기 이야긴데 자기중심적이면서 자기중심적이 아니다. 연결 안 되는 이야기를 야금야금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한 편의 자전적 소설을 읽은 기분이다. 그것도 20대 여성의.


아직도 연재하고 있는 오늘 아침 신문 칼럼에서 이 어린 선생은 <재능과 반복>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말을 했다.

열아홉 살 때는 재능에 관해 자주 생각했다. 글쓰기 수업에서 친구의 글과 내 글을 비교하다가 질투에 사로잡히는 시절이었다. (........)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 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십 대 때 함께 글쓰기 수업에 다녔던 친구가 얼마 전 나에게 말했다. 어느새 너는 숙련된 세탁소 사장님처럼 글을 쓴다고. 혹은 사부작사부작 장사하는 국숫집 사장님처럼 글을 쓴다고. 나에게 그것은 재능이 있다는 말보다 더 황홀한 칭찬이다. 무던한 반복으로 글쓰기의 세계를 일구는 동안에는 코앞에 닥친 이야기를 날마다 다루느라 재능 같은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 (......) 남에 대한 감탄과 나에 대한 절망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 반복 없이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기꺼이 괴로워하며 계속한다. 재능에 더 무심한 채로 글을 쓸 수 있게 될 때까지.

내 스물아홉은 IMF시대로 가정경제는 위태롭고 벌써 아이는 둘씩이나 주렁주렁, 책과 글쓰기는 다른 세계였다. 

학교 때도 글쓰기나 문학과는 전혀 관련 없는 전공에 글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이렇게 부끄러워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 계영, 에게 들려주는 듯, 위로하는 듯, 용기를 주는 듯, 오늘 또 어린 작가는 나를 붙잡았다.


이슬아 수필집을 읽으면 재밌고 아름답고 쓸쓸하고 외롭고, 이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어 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빈집 연가(戀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