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째- 라덴부르크, 루트 비 히스 부르크
오후에 슈투트가르트 근처 루트 비 히스 부르크라는 작은 도시에서 열리는 바이올리니스트 '프랑크 페터 짐머만'의 음악회가 예정된 날이다. 오전에 숙소를 체크아웃하고 오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 비 히스 부르크행 기차를 타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기차 시간까지 하이델베르크를 더 둘러봐야 했지만 이미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어제 강변길을 걸으며 발견한 강 건너 마을 말이다. 선착장처럼 보이는 특이한 배를 타고 저 작은 강을 건너면 앨리스의 토끼 굴처럼 왠지 뜻밖의 장소로 갈 것만 같았다.
짐을 싸서 숙소 문 앞에 내어 놓고 바삐 강 쪽으로 걸었다.
어떻게 타야 될지 몰라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데 마침 자전거를 끌고 오는 할머니 한분이 있었다.
얼떨결에 눈인사를 살짝 하게 되어 인상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을 믿고 독일 말이 되는 아들을 등 떠밀어 보았다. 예상대로 할머니는 옆에 있는 나한테까지 눈길을 주며 친절하게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
배 한대가 하루 동안 계속 이쪽저쪽을 왔다 갔다 한다며 곧 저쪽 편에서 올 거라 했다.
요금을 받는 차장(?)이 있고 1인당 0.5유로라고.
조금 있으니 선홍빛 얼굴을 한 체격 좋은 전형적인 독일 여성이 야무지게 서 있는 배가 다가왔다.
강 사이에 체인을 연결해 놓고 감으며 움직이는 독특한 방식의 배였다.
건너 마을 사람들이 내리고 이쪽 마을 사람들이 탔다. 사람도 타고 자전거도 타고, 승용차까지 탔다.
저편으로 가는 길이 이것밖에 없나 싶어 두리번거려보니 약간 먼 곳이었지만 분명 다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 곳 사람들은 5분 남짓 배를 타기 위해 저렇게 기다리고 탈것을 태우는 불편함을 사서 하고 있었다. 냇물보다는 폭이 넓고 강이라고 하긴 좀 뭐한, 어쨌든 여기서는 강인 곳을 건너기 위해서 말이다.
차장은 또 앉아있는 사람 각각에게 다가가 배 삯을 받는다. 어릴 때 '오라이 오라이' 외치던 버스안내양이 시간여행을 온 듯, 문화적 충격에 적잖이 놀랐지만 옆에 앉은 독일인들은 일상인 듯 무심하다.
자전거 할머니한테 건너편 마을엔 뭐가 있냐 했더니, '라덴부르크'라는 옛 도시인데 아름다운 공원도 있고 구시가지가 볼만하고, 특히 지역 박물관에 꼭 가보라고 추천했다.
라덴부르크? 처음 들어본 이름이다.
배에서 내려 자전거 할머니가 가르쳐 준 방향으로 걸었다.
우리가 걱정되는지 할머니는 한참 동안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온 데 아름드리 큰 나무가 우뚝우뚝 서 있고 초록 벌판이 쫙 깔린 넓은 공원이 나왔다.
아이들, 젊은이들 무리가 잔디밭에 큰 천을 깔고 앉아 야외수업을 하는지 소풍을 나왔는지 시끌벅적했다.
운동기구 없는 공원, 나무도 사람도 자연에 포함된 듯하다.
점점 안쪽으로 가니 정말 유럽이 확실히 느껴지는 구시가지가 나왔다.
작은 광장이 있고 주변 카페에는 대부분 중장년층과 노인들이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여름 한낮을 시작하고 있었다. 광장에서 이어진 어느 골목을 들어서도 예스러움이 가득한 한적한 골목과 집들 때문에 감탄이 절로 되었다. 다양한 모습의 집 바깥에는 집이 지어진 연도가 적혀 있었는데, 1480년, 1500년, 16... 헐!
이렇게 오래된 도시라니.... 밤하늘 수많은 별들이 어마어마한 세월을 뚫고 달려와 우리 앞에 나타나듯, 여기 집들도 오랜 세월을 보내고 보내서 동양의 작은 나라 작은 도시에서 온 내 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아치형 솟을대문을 지나 불쑥 들어선 어떤 마당은 기시감이 들 정도로 친근하기도 덩굴이 주렁주렁한 골목은 꿈속에서 헤매던 그곳 같기도 했다.
한정된 시간이 무지 아쉬울 정도로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기차 시간 때문에 바삐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와 검색해보니 라덴부르크는 잠시 머물러 받은 특별한 인상만큼 오래되고 멋진 곳이었다.
4년에 로마 군대가 주둔해 로마 유적들이 곳곳에 있는 거의 나이가 2000년 가까운 오래된 도시라고.
자동차 발명왕 카를 벤츠가 이 동네에 살았으며 살아생전 자동차를 개발하고 생산한 곳이 벤츠 박물관이 있는 슈투트가르트가 아니라 사실은 이곳이라고도 했고, 선착장 근처 그 공원은 독일에서 꼭 방문해야 할 아름다운 공원으로 지정된 곳이란다.
독일 전통가옥들이 다양한 공간으로 쓰이는 오래된 곳이나 크리스마스 마켓이 유난히 예쁘다고 소문날 정도로 생기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
참! 자전거 할머니가 꼭 가보라고 한 지역 박물관도 못 가봤네...
계획에 없던 정말 뜻밖의 여정이라 더 꽂힌 것일까?
언젠가 다시 와서 푹 머무는 여행을 꼭 해보고 싶은 곳 라덴부르크, 너 찾았다!
루터 비 히스 부르크행 기차를 하이델베르크에서 탔다.
라덴부르크의 은은한 여운과 열망하던 연주자를 보러 간다는 흥분 때문에 기차에서의 시간은 기억에 없다.
'철학적 연주'를 한다는 내한공연 글귀에 번쩍해 짐머만의 유튜브 빠순이가 된 지 어언 10년~.
바이올린 연주를 철학적으로 한다는 게 어떤 건 지 궁금해 듣기 시작했지만 이젠 짐머만처럼 연주하는 게 철학적이라고 믿고 있다. 최근에 맛을 알게 된 금방 갈아 내린 브라질 커피처럼 중후하고 그윽하다.
콘서트홀이 아닌 오래된 궁전? 성? 같은 곳에서 연주하는 바흐 바이올린 소나타 영상은 그 느낌을 확실히 눈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가보지 않은 먼~ 독일의 향기를 마구 뿜어 오늘 여기로 이끌기까지 했으니.
캐리어를 덜덜 끌고 ludwigsburg residential palace라는 궁전을 찾아갔다.
그곳에 있는 여러 건물들 중 residenzschloss ordenssaal라는 성에서 음악회가 열린다.
18세기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궁전이고 베르사유 궁전을 본 따 지었다지만 비엔나 쉰 부른 궁전밖엔 못 본 내겐 그곳과도 흡사했다. 다른 점이라면 여긴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 너무 한산하다는 거. 좋았다!
그러고 보니 서양 사람들도 경복궁이나 창덕궁을 비슷하게 볼 것 같다.
시간이 제법 남아 입구 카페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러 나섰지만 뜨거운 여름 햇빛과 큰 건물이 주는 위압감에 눌려 금방 지쳤다.
쉴 곳을 찾다가 마침 사람 손길과 발길이 미치지 않은 듯한 공간을 발견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작은 언덕이라 그늘져 시원하기까지 했다.
왠지 왕자나 공주가 야단맞고 뛰쳐나와 훌쩍이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찾을만한 장소라고나 할까.
방치된 이끼 낀 우물터, 깨진 화분에서 나와 막 자라고 있는 허브들, 아이들이 미끄럼 타기 딱 좋은 잔디언덕까지... 그리고 우리밖에 없었다.
자로 짜 맞춘 듯 디자인된 화려한 궁전 정원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우린 비밀 장소 같은 그곳이 더 좋았다.
모처럼 큰소리로 얘기하며 웃고 떠들고 남들의 시선을 벗어난 걸 즐기듯 한껏 포즈 잡으며 사진도 찍었다.
먼 독일 땅에 왔는데 산에서 삐삐 뽑고 아카시아 파마하며 놀았던 어린 시절 초여름 냄새가 여기서도 나는 것 같았다.
음악회 시간이 가까워져 schloss(성) 앞 벤치에 앉아 삶은 계란을 몰래 까먹으며 사람들을 기다렸다.
첫 번째로 나타난 어떤 중년 남자는 성 안에서 와인 잔을 들고 나오더니 폼을 잡고 광장을 돌아다닌다.
참 별사람도 다 있네... 점점 많은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고 어느새 아들과 난 서로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다들 파티에 온 사람들처럼 어찌나 차려입고 왔던지 여행 중이지만 나름 신경 쓴 우리 의상이 보잘것없어 보였다. 거기다 모두 백인 중, 노년층이고 젊은이는 거의 없었다.
유난히 피부가 검은 아들과 유난히 키가 작은 내가 캐리어까지 덜덜 끌며 입장한다면 여러모로 튈 것임에 분명하다. 이번엔 앨리스의 잘못 들어온 토끼굴 같다! 하지만 우린 토끼처럼 허둥대지 않았고 시간에 맞춰 유유히 성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캐리어를 맡기는 장소가 있었다. 먼저 들어온 사람 몇몇은 역시 와인을 한잔씩 들고 로비를 이리저리 다닌다. 그냥 주는 거야, 사 먹는 거야? 궁금했지만 안 본 척하고 홀 안으로 들어갔다.
유튜브에서 본 영상과 분위기는 비슷하나 생각보다 낡고 좁았다.
우리 자리는 무대 정면이 아니라 무대 바로 옆 측면이었다.
바이올린 연주자는 측면을 보고 연주하기 때문에 우리랑 가까이서 마주 보게 생겼다.
숨소리, 작은 몸짓까지 연주자한테 영향을 줄 것만 같은 자리라니!
일반적인 콘서트홀 생각하고 짐머만을 가까이서 보고픈 마음에 그곳을 예약했는데 이런 난감한 일이~.
긴장감이 몰려왔다
.
드디어 짐머만이 피아니스트랑 입장했다. 유튜브에서 본 얼굴이랑 너무 똑같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했는데 조금의 미동도 허락하지 않는 상황에 신경 쓰느라 음악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다행히 연주 시간이 짧아 실망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족쇄에서 풀려난 것 같아 안도감도 있었다.
그런데.... 앙코르곡을 한다기에 불편한 자리를 고쳐 앉다가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허리 뒤쪽에 둔 가방에서 물통이 떨어져 ‘탕!’하는 소리가 홀 전체에 울려 버린 것이다.
순간 난 눈을 감아 버렸다.
실눈을 떠보니 옆에 있는 아들이 잽싸게 통을 주워 올리며 자세를 고쳐 앉는 척했다.
그다음 아들은 눈길을 어디에다 두었을까?
... 짐머만이 우리 쪽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연주를 시작했다. 앙코르곡이 무슨 곡이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다만 듣기 상그러운 실험적인 곡 느낌이 났다는 거 밖에는.
허탈한 마음으로 연주장을 나와 화려한 정원이 보이는 곳으로 빠져나가니 이젠 대부분의 사람들이 와인을 들고 갖춰 입은 옷만큼 그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살롱 음악회라는 건가?
가지고 온 리플릿을 찬찬히 보니 오늘 연주회는 지역 축제 중의 한 꼭지였다.
분명히 우린 구글에서 예매했는데... 구글이 대단한 거야, 짐머만이 대단한 거야?
이렇게 내부자들의 행사에 물색없이 다녀왔다.
덕분에 그토록 열망했던 세계적인 바이올린 연주자 프랑크 페터 짐머만과 눈을 맞추는 영광도 누렸지만....
별은 하늘에 있어 빛나고, 가질 수 없어 자꾸 보게 되나 보다.
유튜브로 더 이상 짐머만 연주가 잘 안 봐진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루이스 캐럴/ 펭권클래식/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