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숙면은 어렵고 어두운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와 한참을 뒤척이고 있을 즘 닭울음이 들린다.
숙소 후기에 누군가는 이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던데, 난 미리 정보가 있어서 그런지 반가웠다.
닭도 이른 새벽이라 조심스러운지 살포시 우는 듯하다. 얼마만인가! 새벽에 닭울음소리를 들은 게.
점점 창밖이 밝아오고 점점 닭울음소리도 커진다. 예민한 사람들은 정말 늦잠 자긴 글렀다.
해도 늦게 지고 낮은 더 일찍 시작되는 여기. 내 잠을 어떻게 찾아올까? ㅠ.
눈곱만 떼고 마을 아침들도 볼 겸 빵을 사기 위해 밖을 나섰다.
사방이 고즈넉하니, 시원한 아침 햇살과 마을 전체에 스며있는 라벤더향은 지난 잠자리의 괴로움을 한방에 날려 주는 듯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드문드문 있는 상가들을 힐끔거리며 빵집 앞에 이르니 정말 거기만 문이 열려 있다. 근데 상상했던 그런 빵집은 아니고 어디서 구워와 팔기만 하는 그런 곳이었다. 막 진열 중인 빵에서 나는 단내 때문인지 벌들이 정말 벌떼처럼 몰려와 빵집 여기저기 왕왕거리고 있었다. 아마 길가 라벤다 꽃에서 왕왕거리던 그 벌들이겠지. 놀라운 광경에 문 앞에서 쭈뼛거리고 있는데 더 놀라운 건, 주인아줌마와 몇 명 서 있는 그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벌에 신경을 안 쓰고 접시도 없이 카운터 계산기 옆에 마구 척척 올려진 빵들을 말없이 사가는 것이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 못지않게 이방인을 마주한 아줌마의 눈빛에도 약간 긴장감이 돌았다. 서툰 영어로 몇 마디 하니 전혀 못 알아들어 바디랭귀지로 빵과 우유를 고르고 멋쩍게 나왔다.
어제저녁 잠들며 기대했던 빵집이 아니어서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문득 나를 포함한 사회는 빵집에 대한 판타지를 만들며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빵은 주식이 아니니 여유를 갖고 누리는 달콤함이다. 그래서 TV광고도 실제 빵집도 들어가면 깨끗한 접시와 집게를 집고 천천히 둘러보며 고르는 여유 부리는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 빵집은 일찍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이 생계유지를 위해 줄 서 기다리는 생활공간이었고, 벌들도 그 공간에서 당분 모으는 본연의 일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참 자연스럽다. 어떤 인공의 장식이나 치장이 없는 이곳 사람들과 주변 환경. 그런 여기가 더 화려해 보인다면 그건 나만의 취향일까.
돈 주고 사지 않아도 바깥만 나오면 그토록 좋아하는 라벤더향이 온몸에 달라붙고 자연다큐에서나 요즘 볼 수 있는 벌들이 지척에서 왕왕거리니 말이다. 여기서는 까탈스럽게 추구하던 '위생'쯤은 어디 날려버려야 될 것 같다. 후식이나 간식이 아닌 주식이 될 빵을 안아름 안고 왔던 길을 총총 돌아왔다.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나니 그냥 그 마을에서 하루 내 빈둥거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아들은 그래도 하이델베르크성에 가잔다. 그래, 그래도...
트램을 타기 위해 20분 정도 걷는다 해 이젠 흔쾌히 나섰다. 큰 도로 쪽을 가기 위해 마을 외곽 쪽으로 가는 길에 공원묘지 같은 곳을 지나게 되었다. 꼭 잘 가꾸어진 공원 같았다. 각 묘지에 딸린, 하나도 같지 않은 작은 정원들이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흙이 촉촉하게 젖어 있기도 하고, 바로 근처에 풀을 뽑고 물을 주는 사람이 눈에 띄는 걸로 봐서 일상으로 매일 묘지가 가꾸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죽음도 일싱으로 들어와 있는 듯했고. 예쁘서 사진을 찍어대니 아들은 그러면 안될 것 같다며 조심스럽다.
벌써 이 아이에게도 죽음의 색깔이 정해졌구나...
묘지공원을 지나 아름드리나무와 밀 수확한 누런 들판, 해바라기가 심긴 노란 들판을 끼고 있는 큰길을 제법 걸었다. 따끈따끈한 햇볕을 맞으며 걸었지만 무덥지 않으니 스카프와 긴 옷을 입고도 걸을 만했다.
그냥 지나칠 뻔 한 한산한 역에서 트램을 타고 어제 설레며 왔던 길을 돌아갔다.
트램 안은 밝고 고요했다.
하이델베르크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성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들어선 골목이 관광지 분위기다.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소리가 제법 왁자지껄하고 기념품 가게들도 복작거리고... 마침 헌책방이 있어 주인과 흥정하며 오래된 그림책을 몇 권 샀다. 딱 거기까지, 성에 올라갈 수 있으려나 싶을 정도로 갑자기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다리가 후덜거렸다. 평소 체력으로 봐서 며칠째 잠을 못 자고 새벽부터 움직였으니 오후가 되면 이렇게 되는 건 당연지사다. 그래도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성을 꾸역꾸역 올라갔으나 장엄한 역사가 서리고, 하이델베르크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멋진 장소라도 즐겨지지가 않았다. 그냥 나무 그늘에 앉아 아이스크림 빠는 게 좋았다. 해가 중천에 있었지만 빨리 네카하우젠 숙소로 돌아가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아들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내 상태를 파악했는지 그냥 돌아가자고 했다.
묘지 입구에 내려 네카하우젠성 돌담길로 접어드니 후덜 거리던 다리가 평정을 찾고 숨이 깊이 쉬어진다.
좀 쉬었다가 해 질 무렵(거의 9시)에 어제 이 동네 들어오며 감탄한 강 쪽으로 산책을 나가 보았다.
시내에서 그렇게 와버린 게 아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가고 있는 시간이 아깝기도 하고...
집들 사이 좁은 골목길을 걸어 강둑길에 올라서니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찻길에서는 안보이던 곳인데 강둑길을 사이에 두고 강과 집들의 정원(다들 기가 막히게 잘 꾸며 놨다!)이 양쪽에 위치해 있고 그 길이 해 질 무렵 노곤한 빛과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꼭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생뚱맞게 슬픔이라는 녀석까지 슬며시 다가왔다면 감정의 오버일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 <산적의 딸 로냐>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비르크는 어스름이 깔린 숲을 둘러보며 묘한 기분을 느꼈지만,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가슴속 깊이 아픔과도 같은 그런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여름날 저녁의 아름다움과 평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비르크는 깨닫지 못했다.
비르크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 대목을 읽고 아픔, 아름다움, 평화가 공존하는 상황을 상상했던 난 강변을 걸으며 아름다워서 느끼는 아픔, 슬픔, 외로움을 기꺼이 맞아들였다. 막상 이런 감정을 현실에서 대면하니 입에서는 '비현실적'이라는 감탄이 자꾸 나온다. 비르크보다 나이는 많으나 자연에서 멀어져 버린 아들은 엄마가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 그렇냐고 물었지만 그건 아니라고 말했다.
몽환적인 그 길에 포르투갈 레스토랑이 있어 기웃거려 보았다. 길가에선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여기 다 모였나 싶을 정도로 마당 테이블이 꽉 차 있었다. 모두 어찌나 조용히 음식을 먹으며 얘기하던지 이방인인 우리가 왠지 끼어들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한 바퀴 더 돌고 오니 좀 한산해져 있었다. 9시 이후라 음식은 안되어 어차피 맥주가 더 궁해 알코올이 안 들어간 맥주를 시켰다. 구수하고 달큼했다. 안주 없는 맥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아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좀 밀도 있게 나누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체력 때문인지, 알 수 있는 그날 밤 분위기 때문인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들의 인생까지 애잔했다면.
모든 존재가 아름답고 슬펐던 밤~
강가에 있던 배가 건너편 마을로 데려다준다 하니 내일은 그럼 강 건너 마을로 가볼까.
*참고하거나 영감을 준 책
산적의 딸 로냐(아스트리드 린드그렌/시공사/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