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긴 하루

# 첫 날 - 프랑크푸르트

by 여름지이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인천공항에 들어섰다. 비행기 이륙 시간은 낮 12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해외여행에서 이렇게 혼자 떠나보기는 처음이라, 두려운 건 별게 아니고 공항에서 탑승까지의 절차다. 예전에 80 먹은 동서 친정어머니도 혼자 미국을 다녀오셨다는데 내가 못할까 싶었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리저리 눈치 봐가며 이쪽저쪽 가보고 물어물어 탑승 통로 앞까지 와 줄이 제일 짧은 곳에 섰다. 웬 유니폼 입은 여자가 다가오더니 여기 서면 안된단다. 거긴 비즈니스 탑승객 줄이라고... 내가 티켓을 보여 준 것도 아닌데 이 여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이코노미인 줄?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뭐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이젠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를 탄다~~~!


여행할 때 제일 부러운 사람은 아무데서나 잠 잘 자는 사람이다. 그렇지 못한 이 몸은 비행기 안이 고행의 장소다. 젊은 사람들은 잠도 잘 자고 영화도 잘 보던데 난 아무것도 안된다. 비행 11시간 동안 쪽잠 한번 못 자고 영화에 집중도 안되고... 하릴없이 시시때때로 비행기 안을 걷고 또 다리가 저려오면 한쪽 귀퉁이에 서서 스트레칭을 한다. 그나마 장거리가 두 번째라 이렇게라도 할 수 있지만 첫 여행 땐 마치 벌이라도 받는 듯 꼼짝없이 10시간가량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필 이번엔 생리까지... 컨디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생리주기. 미리 알았더라면 조치를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갱년기가 다가오는지 불규칙 해져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굳이 인위적으로 조절해야 하나 싶어 맞닥드리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내 다짐을 몸이 반기기라도 하듯 이번 여행에 딱 찾아와 메이트가 되다니, 헉. 함께 해주어 반갑다! 시작된 이래로 은근히 귀찮아하고 구박만 받았는데, 이제 갈 때도 다되어 가니 여유롭게 나와 여행을 하자꾸나. 이번만큼은 구박을 하지 않을게. 불편하지만 어쩌겠니... 유난히 이번엔 네가 선홍빛이네. 여행기분에 취해 새끼손가락에 바른 빨간 매니큐어 색깔이랑 너무 똑같아 화장실에서 깜짝 놀랐지. 손에 이렇게 많이 묻었나 싶어서... 편치 못한 몸을 이렇게라도 느끼며 위로하다 보니 그래도 시간은 흘러 곧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11시간을 날아 독일 땅에 왔는데도 겨우 오후 4시 30분. 입국심사를 마치고 얼굴이 노랗게 되어 공항을 굽이굽이 빠져나오니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현실 메이트, 아들을 만났다! 마치 현지 가이드인 양 서슴없이 나를 데리고 공항을 빠져나가며 밥 먹을 곳을 찾는다. 언어가 되고 구글맵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건 저런 거구나. 어디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 거기다 젊음까지 온몸에 뒤집어쓰고.... 정신 차리고 중앙역 근처 한식당 찾아가는 길을 걷다 보니 독일에 온 게 실감 났다. 한여름 날씨는 왜 이리 스산하며 인종들은 또 왜 이리 다양한지. 아들도 만났고 배부르게 밥도 먹었는데(근데 비빔밥이 현지화되어 느끼했다) 기분이 날씨처럼 스산해져 온다. 지난 6개월 동안 여기 오기 위해 그렇게 애썼는데... 몸도 마음도 김 빠진 풍선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정해놓은 숙소로 가기 위해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리는 트램을 타고 도심을 조금 벗어나니 온통 초록초록이다. 마치 숲 속을 통과하는 듯, 우울감도 통과되는 듯~


하룻밤 숙박료가 오만 원인 겉은 번드르르한 변두리 호텔은 가격에 맞게 고만고만했다. 침대가 스펀지 같이 푹 꺼진다. 이런 침대에 잤다가는 피로가 더 쌓일 것 같아 그나마 쪼금 여유공간인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하룻밤인데 뭘, 잠이 쉬이 안 오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일곱 시간이 더해진 무지 긴 하루를 마감하기 위해 누워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