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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Aug 05. 2020

디어 라이프/ 앨리스 먼로

친애하는 인생에게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이라는 독서모임에서 캐나다 편으로 읽은 책입니다. 문학, 비문학 골고루  운영자가 올려놓으면 한 권 이상 골라 읽고 글을 올립니다. 저는 주로 문학을 선택합니다. 문학은 왠지 보물찾기 같거든요.

읽을 때마다 행간의 의미를 자꾸 발견할 수 있어 놀랍습니다. 여기 14편의 단편들은 더 그랬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아닌 작은 타운의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인데도 어쩜 이렇게 다크 초콜릿처럼 진하고 밀도가 높은지, 최소 두 번 이상은 읽어야 분위기가 들어오고 작가가 숨겨놓은 보물이 조금 보였어요. 그냥 눈으로만 읽다가는 이야기의 흐름이 연결이 안 돼(우리 일상이 늘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중간중간 멈춰 시간, 상황 등을 감지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되는 부분들이 많았지만 한편씩 읽고 나면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이는 색다른 여운이 찾아왔어요.


1900년대 중반 여성들의 이야기고 책의 표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애하는 인생에 관한 이야깁니다. 각 단편들을 몇 줄로 요약해보지만 모호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는 전혀 다르게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쩌면 내 마음에 혹은 건너 건너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누군가에게 들었을 때 깜빡 놀랐다가도 또 금방 잊어버리는 그런 일들 말이죠.


<일본에 가 닿기를>  : 시인인 그레타는 파티에서 처음으로 만난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워하다가 무작정 그가 칼럼을 쓰는 신문사로 편지를 보낸다.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는 것과 같다는, 편지가 일본에 가 닿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아문센> : 끝까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남자에게  결혼식 날 이별을 통보받는 여자. 여러 해가 지난 후 우연히 길에서  사랑했던 남자를 맞닥뜨린다. 그의 왼쪽 눈을 기억하며 섬광 같은 번쩍임을 느낀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건 없다고.

<메이벌리를 떠나며> :  퇴역 군인들을 위한 학교 영어 문학 선생 저벨은 레이라는 학생과 사랑에 빠져 남편과 이혼하고 레이랑 결혼한다. 경찰이 된 레이는 리아라는 소녀를, 밤길에 동행해야 되는 경찰로서의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고, 세월이 흘러 둘의 인연만 남는다. 이저벨이 죽고 리아가 상실 전문가라 불릴 정도로 산전수전 다 겪은 여인이 되어있을 때, 레이는 리아의 이름을 떠올리며 안도감을 느낀다.

<자갈> : 어린 시절 사고 현장에서 언니의 죽음을 목격한 '나'는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그 상황에 붙들려 있다. 가족 안에서 일어난 무거운 사건을 애써 지워버리는 건 잘못이라 생각하고  의붓아버지가 말한, 모든 걸 받아들이면 비극은 사라진다는 뜻은 이해하지만.

<안식처> : 선교를 하러 아프리카에 간 부모님으로 인해 이모집에 머무르게 된 나는 자의식이 강한 엄마와 달리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이모부 비위를 맞추며 집이라는 안식처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모의 삶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이모도 이모부가 신경 쓰이지 않는 상황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자존심> : 태어나면서 언청이 장애를 가진 나는, 어쩌다 부모 잃은 고귀한 부잣집 딸과 엮여 같은 집에 살게 된다.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지지만 세상은 이렇게 생각할 거라 그녀가 눈치 없이 말한다. 남매처럼 서로 보살피는 자연스러운 관계일 거라고. 기가 찼지만 남다른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나.

<코리> : 유부남 하워드랑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소아마비를 가진 코리. 둘의 관계를 알고 있는 가정부 릴리언의 협박에 정기적으로 송금하지만 그 송금한 돈이 하워드에게 갔다는 걸 릴리언이 죽은 후 알게 된다. 달리 무언가를 해보기에는 너무 늦었고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은 관계를 그냥 유지한다.

<기차> : 어린 시절 계모로부터 당한 성적인 학대로 성생활이 원활하지 못한 잭슨. 사랑하는 여자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어 만나기로 한 역이 다가오기 전 기차에서 뛰어내린다. 역시 어릴 때 병든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성적 대상이 되었던 나이 많은 여자 벨을 만나 서로 도우며 잠깐 살지만 잭슨은 부초처럼 언제나 떠나는 인생이다.

<호수가 보이는 풍경> :남편이 살아 있고 운전을 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요양원에 있는 노인 여자, 낸시.

<돌리> : 죽음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로 품위 있는 노부부 프랭클린과 나. 앞으로 인생이 더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무미건조한 삶을 한탄하던 어느 날, 프랭클린의 옛 애인 리가 방문 화장품 장수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자동차가 고장 나 돌리가 집에 머물러야 되는 상황이 발생하고... 나는 질투심에 가출했다가 스스로 돌아온다. 남편 앞에서 엉엉 운다.


나머지 4편은 자전적 소설이라 작가의 지나온 기억에 보태진 지금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10편의 앞선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생들에게 마치 위로해 주는 듯합니다. <밤>에서, 어릴  불면의 밤에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마주친 아버지,  이유를 묻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진실을 고백하고 말아요. 자고 있는 동생 목을 조를까 봐서라고.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어떤 경멸이나 놀라움도 없이 이런 말을 해 줍니다.

"사람들은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한단다."

불면의 밤은 끝이 나지요.

<디어 라이프>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함께 읽은 들은 소설이 전반적으로 요즘 날씨처럼 우울하고 암울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지만,  그래도 중간중간 내보이는 파란 하늘처럼  마음 한편을 밝히는 무언가가 분명 있었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명대사에 화답하는 듯한 지극한 로맨스 이야기 <아문센>,  자존심과 눈치 없음으로 늘 어긋나던 남녀가 창밖을 지나가는 흑백 무늬 작은 스컹크 무리의 아름다움에 그만 희망과 평화의 기운이 빵 터지는 <자존심>, 노년에도 질투, 밀당이 존재함을 알콩달콩 보여주는 <돌리>... 등, 가려진 롱치마가 더 섹시할 수도 있듯 자세히 읽어야 보이는 이런 장면을 발견할 때는 소설의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일본에 가 닿기를>에서 페미니즘이란 말이 등장하긴 하지만 앨리스 먼로의 여성관은 요즘과는 살짝 다릅니다. 해설에서 말한 것처럼 여성이라 여성 이야기를 잘할 수 있었고 여성을 그리는 작가지, 결코 여성을 들먹이는 작가는 아니라는 거죠. 들먹이진 않지만 지난 시대의 여성들은 현실을 살아가며(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도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온 몸으로 말하는 듯했습니다. 내밀하고 은밀하게, 들먹이는 것보다 오히려 큰 힘을 뿜기도 하지요.


앨리스 먼로는 2013 노벨상을 받지만 그렇게 인정받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단편 소설가로서 단단한 입지를 굳혔으나 소설의 배경이 주로 캐나다 작은 타운의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라 대의(大義)가 필요했던 노벨상 조건에 이프로 부족했던 거지요. 그런 분위기를 작가도 의식한 듯 <안식처>에서 이모가 아프리카에 간 진보적인 활동가 동생에게 자기 이야기를 전하려다 망설이며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집 얘기는 시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일 것 같다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었을 까요. 살다 보면 생기기도 하는 그런 일, 가만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스쳐 지나갈 뿐인, 은밀하고 작은 일을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 낸 그녀는, 소설처럼 은근히 놀라운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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