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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Oct 22. 2020

고요한 사건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중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의 그림 <고요한 사건>에서 빌려왔다는 이 단편의 제목이 들어왔다. 소설집에 들어있는 모든 이야기들이 고요한 사건들 같아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단편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앨리스 먼로도 백수린 작가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파도 위에 돛단배를 한 척 띄운  바람 따라 물결 따라 고요한 사건들 사이를 유영하다 바라보다 건드리기도 한다. 제목과 내용이 주는 이미지가 이렇게 다가온다. 


이미지에 잘 사로잡히는 내게 이 단편이 주는 매력은 해체하고 싶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감상문을 적는답시고 내용을 요약하고 느낌을 늘어놓으면 전달이 오히려 안될 뿐 그만 시시해져 버릴 것 같다. 칸딘스키를 검색하다가 보니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던 학자에서 모네의 그림을 보고 화가의 길로 들어서버린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다.


야외 스케치를 하러 나갔다 작업실 문을 열었는데, 저녁노을을 받아 빛나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그림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작업실인데도 불구하고 생전 처음 보는 그림이라 홀린 듯이 그림 앞으로 다가가 살펴보니 놀랍게도 거꾸로 놓인 자기 작품이 아닌가. 자신이 그린 작품이 거꾸로 세워진 채 노을을 받아 새로운 색채와 형태로 보였지만 자기 그림임을 알아차린 순간 아무리 다시 거꾸로 세워봐도 처음 느꼈던 감동이 오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인지하자 그림을 감상하는데 방해가 된 것이다. 문자에 일찍 눈뜨는 것보다 읽어주는 책을 충분히 듣고자란 아이가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글쓰기도 어느 면에서 이런 역할을 한다. 책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만(자기 발서나 지식책), 문학을 읽고 감상을 쓴다는  글 초보자 입장에서 늘 부족함을 느낀다. 가끔 모호했던 소설은 쓰다가 오히려 숨겨진 의미가 환해지는 발견의 기쁨을 만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모두 좋았던 단편들 중 특히 이미지로 빛났던 이 소설은 그렇다. 중간중간 메모했던 단어들로 상기한다면,

재개발, 전학생, 친구, 냄새, 악취, 폐가, 아름다움, 골목, 소리, 고양이, 붉은 깃발, 계층, 극복, 안주, 아버지, 무용해지다, 구경꾼, 창밖, 눈송이


처음 들어선 동네나 집에서 풍겨져 오는 냄새가 그 공간의 이미지를 얼마나 좌우하는지 여러 번 이사를 해본 경험으로 안다. 방향제로도 감출 수 없는 냄새, 감추기 위해 방향제를 뿌린 흔적은 이전의 냄새를 더 상상하게 다. 냄새로 계층을 나누어 버린 그 영화를 보고 우리들 각자는 냄새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을 것이다. 글자를 읽는데 덥고 냄새가 올라왔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서, 소음보다 참기 힘든 것이 악취라는 것을 나는 배웠다. 소음은 창문을 닫으면 어느 정도는 해결되었지만 악취는 창을 닫아도 창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그 동네에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에서 단 한 번도 맡은 적이 없는 온갖 냄새가 풍겼다. 정화조 트럭이 지나갈 때면 진동하던 악취나 고양이들의 배설물 냄새, 무엇보다도 아무렇게나 거리에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 썩는 냄새는 항상 공기 중에 가득했다. 우리는 더워 죽겠는데도 창문을 열지 못한 채 선풍기를 틀고 살았다. 어머니는 집안 구석구석에 방향제를 갖다놨다. 나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내 몸에서 동네 특유의 냄새를 맡진 않을까 걱정이 됐다. - p86 -


매끈하게 잘 가꿔진 공원보다 담쟁이덩굴이 무질서하게 붙잡고 있는 폐가나 야생초들이 어지럽게 피어난 공터, 물가나 언덕배기 다닥다닥 붙은 집들에 환상을 갖는, 자라지 않은 아이는 이 장면에서 약간 소름 돋는다.

사라져 가는 태양의 빛줄기가 쇠락한 골목과 남루한 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마치 검버섯 핀 노인의 얼굴을 쓰다듬듯이. 그러면 그 손길을 따라, 동네는 쪽잠을 청하는 고단한 노인처럼 주름이 깊게 팬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해가 지고 나면 대기에 남아 있던 온기도 노인의 마지막 숨결처럼 느리게 흩어져갔다. 몸에 한기가 깃들어 더 이상 앉아 있기가 힘들어지면 그제야 나는 쭈그렸던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라한 골목이 어째서 해가 지기 직전의 그 잠시 동안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워지는지 그때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다만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동안 내 안에 깃드는 적요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독이 달콤하고 또 괴로워 울고 싶었을 뿐. - p94 -


살아생전 아버지는 당신은 주변 다른 아버지들과 자신이 많이 다르다고 강조하셨다. 더 책임감을 가졌고 더 가족들을 위해 희생 했노라고. 아버지가 튼튼히 얽어맨 울타리 안에서 세상 모르고 사는동안 누군가는 많이 고단하고 슬펐다.

"아빠, 아빠, 고양이 아저씨가 맞고 있어요." 그뒤로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마 울면서 아버지에게 내가 목격한 것을 설명한 것 같다. 아저씨의 얼굴이 어떻게 부어 있었는지. 그의 몸이 발길질에 어떻게 둥그렇게 말렸다가 다시 가까스로 퍼졌는지. 그리고 피가, 피가 어떻게 흘러내렸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다 들으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찰을 부르고, 사람들을 불러서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줄 거라고. 그러나 놀랍게도 아바지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어머니에게 "얘 물 좀 떠다줘. 숨넘어가겠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 쪽을 바라보면서는 이렇게 천천히 덧붙였을 뿐이다.

"얼굴이 꽁꽁 얼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가서 몸 좀 녹여라." - p 101 -


주어진 세상에서 안주하고 다른 세상을 기웃거려보나 언제나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겁쟁이, 이 장면에서는 서늘해진다.

그것은 정말 내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커다란 눈송이였다. 마른눈. 자국눈. 가랑눈. 국어사전에서 내가 발견했던 무수한 단어로도 형용하기가 충분치 않던 눈송이. 그토록 숨 막히는 광경을 나는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댄 채 그렇게 한동안 서 있었다. 구겨진 신발 위에, 양말도 없이, 까치발을 한 채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가 그 장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주 먼 훗날의 일이고, 그때 나는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아름다운 눈송이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p1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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