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아래 서서 열심히 듣고 있다.
남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있다. 여자가 오토바이를 모는 남자 등에 바짝 붙어 있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완전한 신뢰가 있어야 저 자세가 나온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모습과 자세가 나올 수 없다. 여자의 저런 신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같이 죽어도 좋다는... 같이 다쳐도 좋다는... 신에 대한 신뢰가 아니고서야...
저런 자세로 오토바이를 타는 것 자체만으로 아름답게 보인다. 바람에 휘날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보여주는 섹시함은 덤이다.
오토바이는 아주 위험하다. 사망할 확률이 자동차보다 10배 이상 높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생각보다 자전거 균형을 못잡아 못타는 사람이 많다. 오토바이는 단순한 균형 이상을 요구한다. 오른손으로 잡고 돌리는 액셀레이터의 아주 예민한 감각도 요구한다. 운동신경 이상의 섬세한 감각과 적응력을 요구한다. 의식뿐 아니라 온 몸의 감각과 신경이 곤두서 있어야 한다. 아마도 그래서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차가 갈 수 있는 곳이면 오토바이는 당연히 갈 수 있다. 포장도로야 당연하고 인도 히말라야 해발 5300 m 고개길도 넘을 수 있다. 라오스 그 열악한 산악도로도 산악용 오토바이의 파라다이스다.
나는 신을 믿는다. 신의 음성이 들릴 때 탈련다. 영어의 understand 의 기원이 '신 아래 서서 열심히 듣고 있다.'라던데... 나도 열심히 서 있는다.
신은 누군가의 상상이 만들어낸 가공물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의지력이다. 그들은 인간의 신경체계를, 아마도 우반구를 점령하고 있으면서, 훈계적이고 교훈적인 경험의 축적에서부터 일부를 분절된 언어로 변환시켜 인간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의식의 기원 -
어느 목사님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성도 자신이 교회가 되면 어디서든 예배를 드려도 괜찮다. 본인이 교회가 되면 본인이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게 안되니까 가서 남의 예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오토바이가 타고 싶다. 내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때 오토바이를 탈테다. 내 모든 것 신께 맡길 때 탈테다.
갑작스런 riding 을 대비해 면허증은 따 놓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