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빌 언덕이 없다면 슬픈 일이다.
선배와의 술자리에서 선배가 그랬다.
"자식에게 아버지는 소가 비빌 언덕 같은 존재여야 한다. 그러니 싫컷 비비라고 해라." 비빌 언덕이란 말이 왠지 그날따라 크게 공감이 왔다. 나도 왠지 그날따라 비비고 싶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이런 속담이 왜 생겼을까 찾아 봤다. 어린 소가 뿔이 나기 시작할 때 그 부분이 많이 간지럽단다. 그래서 언덕에다 머리를 자꾸 비빈단다.
내 아들은 어릴 때 비비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자기 볼을 엄마 볼에... 비비는 감이 제일 좋았나 보다. 한동안 시도 때도 없이 비벼댔다. 남편보다 더 진하게 비벼대는 어린 아들을 아내는 너무 예뻐했다.
내 아들은 한 때 아빠의 아들이었다. 유아원 같은 곳을 다니면서 남자와 여자에 대한 차이를 나름 깨달았나 보다. "우석이 아빠 아들이야 엄마 아들이야?" 하고 물으면 "아빠 아들이야!" 하고 바로 자신있게 말했다. 난 너무 좋아서 한동안 매일 물었다.
의식이 생겨 머뭇거리기 시작할 때까지...
남의 집 아이들을 봤던 기억중에 아빠와 장기나 오목 같은 내기를 하는 중에 지면 울어버리는 아이가 있다. 그 어린 나이에 졌다는 것이 너무 분해서 우는 것이리라. 겨우 아빠와의 내기인데... 그것도 자기보다 훨씬 큰 아빠한테... 아빠도 경쟁상대로 보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인가?
부모의 기대는 크다. 다 자식 잘되라고 하는 말들이 다 너무 부담스럽다. 교육적이고 훈계조의 모든 말은 잔소리일 뿐이다. 잔소리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자식에게 부모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인 경우가 많다. 그럴 경우 대꾸하지 않는다. 대화가 안되는 벽에 대고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입을 닫고 집에서는 조용히 산다. 항상 순종하는 자식들이 잘 크고 있다고 부모는 착각한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 고민하듯이 자식도 자신이 잘 살고 있는지 고민한다. 내가 집을 떠나 독립했듯이 자식도 집을 떠나 독립한다. 독립할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 독립한다는 것이 쉬운일 아니다. 경제적인 독립뿐 아니라 정신적인 독립을 해야 한다. 내가 이런 선택을 했을 때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한다면 아버지인 내가 독립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선택을 자신의 자아에서 우러나온 명령에 따라 하는 것이 쉬운일 아니다.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것과 자식을 독립시키는 것은 전혀 별개다. 소도 비비고 싶을 때만 비빈다. 비빌 언덕이 없다면 슬픈 일이다.